

조선 시대 전라도의 중심이자 풍요와 평화의 상징이었던 나주목(羅州牧). 하지만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주가 품은 위대한 역사와 근현대사의 굴곡은 도시의 쇠퇴와 행정 편의 속에서 점차 대중의 기억 저편으로 묻혀가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인 박연신 대표(카페 ‘바실리에’)는 몇년 전 나주시 도시재생사무국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낙후되어 가던 나주 원도심과 읍성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주민 주도의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다. 행정의 최전선에서 나주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지역 발전의 뼈대를 세웠던 그는, 지금도 서성문 인근의 문화 공간을 통해 변함없이 나주의 위상을 알리는 ‘민간 역사 외교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관아가 품은 천년의 역사란 낡은 역사책 속의 메마른 기록이 아닌, 그 터전 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생한 기억이 축적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법이다.
특히 박 대표의 부모님은 지금까지도 나주 원도심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신다. 읍성의 역사와 주민들의 이야기가 사랑방처럼 오가던 한약방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체득한 고향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가 나주의 숨은 역사를 꿰뚫어 보는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다. 50여 년간 나주 관아 인근을 지키며 도시재생의 거시적 안목과 주민의 미시적 삶을 모두 경험한 박연신 대표. 그의 입을 통해 아주 어린 시절 눈에 박혔던 금성관의 풍경, 청 장년 시절 매일 마주했던 나주읍사무소 앞 북적이던 골목, 그리고 양은 냄비 하나에 담겨 있던 곰탕의 태동을 생생히 복원해 보고자 한다.
다음은 박연신 씨와의 일문일답.
Q.금성관은 명실상부한 나주의 상징입니다. 지금은 복원되어 많은 이들이 찾고 있지만, 박연신 님이 기억하시는 ‘어릴 적 금성관’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합니다.
A.“지금은 담장이 허물어지고 탁 트인 잔디밭이 펼쳐진 아름다운 역사 공원이지만, 제 기억 속 가장 오래된 금성관은 어린 마음에 괜히 무섭고 다가가기 힘들었던 거대한 관공서 건물이었습니다.원래 조선 시대의 귀한 객사 건물이었던 금성관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일제에 의해 철저히 군청 건물로 개조되어 쓰이고 있었지요. 제가 고작 여섯 살 꼬마였던 1976년 무렵까지도 그 아픈 흔적은 제 눈에 아주 기괴한 잔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우람한 기와집 본건물 전면에 뜬금없이 커다란 유리 미닫이문들이 빽빽하게 달려 있었고, 웅장한 앞마당에는 늘 검은색 관공서 차량과 어른들이 바쁘게 오가서 마당 한구석에서 멀찍이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76년 말, 군청이 마침내 이사를 가고 금성관을 뒤덮고 있던 일제의 미닫이문과 시멘트 벽들을 다 뜯어내는 해체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늘 유리문으로 꽉 막혀 있던 그 우람한 기와집이 비로소 탁 트인 진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온 동네 어른들이 ‘저기가 우리 나주의 진짜 보물이었다’라며 감탄하시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일제의 흔적 속에 갇혀 있던 나주의 자존심이 마침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던, 여섯 살 꼬마의 눈에 새겨진 나주의 첫 풍경입니다.“
Q. 정수루 뒤쪽, 지금의 동헌(제학헌) 터 역시 오랜 세월 변화를 겪어온 곳입니다. 과거 이곳은 어떤 시설이 있던 자리였고, 당시 주변의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A.”지금은 발굴 조사를 마치고 탁 트인 잔디밭으로 복원 중이지만, 제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어른이 되어 활동하던 시절까지 정수루 뒤쪽 동헌 터는 나주 사람들의 일상과 행정을 책임지던 ‘나주읍사무소(이후 금남동사무소)’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본래 목사가 집무를 보던 제학헌(동헌) 건물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철거되었고, 일제가 그 자리에 나주읍사무소를 지어 행정청사로 사용했던 것이지요. 광복 이후에도 그 콘크리트 청사 건물이 그대로 쓰였기 때문에, 제 기억 속 정수루 뒤편은 늘 민원 서류를 떼러 오가는 주민들과 공무원들로 북적이는 관공서 골목이었습니다.
청사 주변으로는 대포집이나 서류를 대신 써 주는 대필소, 서점과 문방구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늘어서 있었습니다. 지난 2012년 복원 정비 사업을 위해 이곳에 있던 구 금남동 청사를 철거하고 인근 금성관 앞쪽으로 사무소를 이전하게 되면서, 무려 한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읍사무소 자리’로 불리던 이곳은 마침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역사의 연결고리입니다. 당시에 동헌 터를 비워주기 위해 금성관 앞마당 쪽으로 새로 지어 이사 갔던 구 금남동사무소 건물이,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 나주의 역사를 알리는 ‘나주목문화관’으로 멋지게 탈바꿈해 문을 열었습니다. 천년고도의 핵심 관아 터가 오랜 세월 행정 청사에 가려져 있었던 아픈 근현대사의 현장이었지만, 이제는 그 행정의 유산마저 나주의 역사를 배우는 문화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참 감회가 새롭습니다.”
Q. 과거 금성관과 동헌터 사이의 공간에 ‘매일 시장’이 서서 아주 북적였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시장과 관련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A.”지금의 금성관과 동헌 터 사이 공간은 어릴 적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활기차고 신나는 놀이터이자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매일 시장이 크게 서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지요.
가장 잊지 못하는 기억은 어머니의 곰탕 심부름입니다. 그 시절엔 집에서 양은냄비 하나를 달랑 들고 시장 골목으로 향하곤 했습니다. 가마솥에서 설설 끓고 있는 국밥집에 가서 냄비를 내밀면, 고기를 듬뿍 얹은 뜨끈한 곰탕을 한가득 담아 주셨지요.
그 무거운 냄비를 들고 국물이 쏟아질까 봐 조심조심 걸으면서도, 눈은 사방으로 시장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고소한 전 냄새, 생선 파는 사람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냄비를 들고 오가던 그 매일시장 골목이 바로 지금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나주 곰탕거리’의 진짜 시작점이었던 셈입니다. 장터의 넉넉한 인심과 풍요로운 식재료가 제 손에 들려 있던 작은 냄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Q. 도시재생사무국장을 지내시며 나주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고, 지금도 카페를 통해 나주목의 위상을 알리고 계십니다. 역사적 장소 한복판에서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A.”나주에 살며 도시재생사무국장으로서 고향의 뼈대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하다 보니, 비로소 이 땅이 내 안에서 온전히 살아나고,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것들의 소중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나주는 예로부터 참 풍요롭고 평화로운 도시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냈을 정도로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넘쳐났지요. 문화라는 것은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법입니다. 나주는 영산강 물길을 통해 수많은 물자가 오갔기에 쪽염색, 직조 문화, 그리고 개성에 버금가는 격조 높은 음식 문화까지 이미 대단한 문화적 자본을 품어온 도시입니다. 수백 년간 겹겹이 쌓인 이 찬란한 역사가 바로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공간입니다”.
Q,과거에는 ‘도시재생사무국장’으로서 나주의 뼈대를 세우는 행정의 최전선에 계셨고, 지금은 서성문 앞 카페 ‘바실리에’에서 민간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역할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나주를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계시는 특별한 이유와, 이 일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A.“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너무 평화롭고 풍요로운 공기 속에서 살아왔기에, 정작 나주 사람들 스스로 그 가치를 너무 흔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지금 서성문 인근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나주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너무 흔해서 미처 몰랐던 우리 고향의 위대함과 자부심을 주민 스스로 깨닫고 되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과거에 행정의 영역에서 도시재생을 고민했다면, 이제는 민간의 영역에서 역사 문화를 전하는 것, 그것이 천년고도 나주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나주 사람으로서 제가 해야 할 뜻깊은 역할이라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