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소리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임방울 국창의 생가터를 찾아 떠난 여정은 쉽지 않았다.
나주시청에서 광주공항 후문을 지나 우측 골목길로 접어드는 약 32km의 길을 달려 도착한 곳, 광산구 원도산안길 37-1번지에 위치한 임방울 국창의 생가터다.
1905년 전라남도 광산구 송정동 도산리 679(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 679번지)에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임경학과 어머니 김나주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임방울은 우리 고장이 낳은 최고의 명창이다.
판소리사에서도 임방울제는 가장 특별하고 의미 있는 소리제로 평가받는다.
임방울은 화려한 무대보다 시골 장터나 모래사장에서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한을 노래한 음유시인이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 만주에까지 그의 명성이 울렸으며, 유성기 음반 ‘쑥대머리’는 백만 장이 넘게 팔렸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백성의 설움과 절망을 노래한 임방울의 한 맺힌 목소리는 당대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우연한 기회에 나주시가 운영하는 ‘신청문화관’을 알게 되었다.
나주시가 정미현 선생에게 운영을 맡겨 판소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나주시의 홍보 역할도 하고 있는 이곳에서 명창 열아홉 분의 계보 및 선생안(先生案) 등을 보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잊히고 사라져가는 현실을 되새기게 되었다.
판소리 서편제의 본고장인 나주에서 1910년대 명창과 기라성 같은 소리꾼 선배들의 족적을 추적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욕망에 몇 달을 고민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나주시니어클럽 홍보단원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획 취재를 시작했다.
3월 13일, 송정리 장날(3일, 8일)을 맞아 임방울 국창의 생가터를 찾았다.
안내판을 보고 골목길로 접어들었으나 군데군데 안내판이 없어 동네 주민에게 물어가며 찾아갔다.
“저기 돌아서 가면 생가예요”라고 말씀해주신 동네 주민의 안내로, 마침내 담벽에 “국창 임방울 소리로”라는 글자가 새겨진 생가터를 발견했다. 그렇게도 와보고 싶었던 국창의 생가였다.
아쉽게도 생가는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고, 출입문 우측에 작은 입비석만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임방울 국창 생가터 옆 주택은 광산구 원도산안길 41번지로 확인되었다.
주변을 스케치하고 송정리 장날 구경도 했으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날 모습을 뒤로하고 귀가했다.
앞으로도 기라성 같은 국창 및 명창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판소리에 몸담은 10여 년의 경험을 살려 계속해서 명인들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