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산강이 굽이쳐 흐르는 전라남도 나주.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 강변의 평야 지대는 예로부터 ‘호남의 웅도거읍(雄都巨邑)’으로 불려왔다. 풍부한 물, 기름진 토양, 온화한 기후—세 조건이 맞아떨어진 이곳에서 수천 년간 하나의 색깔이 땅속 깊이 스며들었다. 하늘을 닮은 빛, ‘쪽빛’이다.
나주에서 천연염색이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산강 중하류가 관통하는 기수(汽水) 지역은 쪽풀 재배에 최적의 토양 조건을 만들어냈고, 활발한 뽕나무 재배는 비단 직조 문화까지 함께 꽃피웠다. 한국 고대왕권의 중심지였던 나주는 일찍부터 면직물·실·천연염색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다.
쪽(蓼藍)은 여뀌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식물로, 그 잎에서 추출한 천연 인디고 염료는 옅은 초록빛부터 맑은 하늘색, 깊고 짙은 남색까지 다채로운 색감을 자아낸다. 나주 사람들은 고대부터 이 식물을 재배하고 발효시켜 직물에 물들이는 기술을 대를 이어 전승해 왔다. 천연염색은 단순한 공예가 아니라,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자 문화 정체성이었다.
2001년, 국가는 나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두 장인에게 동시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기능보유자 지위를 부여했다. 다시면에서 전통 쪽 염색을 이어온 정관채 염색장과, 문평면에서 활동하던 고(故) 윤병운 염색장이 그 주인공이다.
정관채 염색장은 오늘도 다시면 무숙로의 전수관에서 쪽 염료(니람) 추출부터 소석회·잿물 등 재료의 직접 생산, 완성 작품 전시까지 전통의 전 과정을 살아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2010년 타계한 윤병운 염색장의 뒤는 아들 윤대중 전수조교가 문평면 명하마을 전수관에서 묵묵히 잇고 있다.
나주의 무형문화유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 샛골나이’ — 나주 샛골의 무명 짜는 직조 기술이다. 고 김만애·노진남 명인의 맥을 이어 현재 원경희 씨가 다시면 청림마을 전수관에서 그 전통을 지키고 있다. 쪽 염색과 직물 생산, 두 분야 모두에서 국가가 인정한 장인이 살아 숨 쉬는 도시 — 이것이 나주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다.
2006년 영산강변에 문을 연 한국천연염색박물관(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백호로 379)은 천연염색 분야 국내 최대 규모의 전문 박물관이다. 상설전시장, 자료관, 체험장, 교육 세미나실, 연구실을 두루 갖춘 이곳은 보존·연구·대중화라는 세 축을 동시에 구현하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체험에 있다. 참가자들은 쪽풀에서 염료를 추출하는 원리를 배우고, 홀치기 기법으로 천에 무늬를 잡은 뒤, 염료에 담그고 산화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며 쪽빛이 서서히 깊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 손끝에서 수천 년의 기술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어린이·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한 상설 체험장은 연중 운영되며, 쪽 염색 스카프 만들기 등 프로그램이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박물관을 운영하는 (재)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은 전통 기술 전승은 물론 현대적 산업화와 연구개발까지 함께 추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문화체육관광부·한국박물관협회 공모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사업에 선정되어 지역 주민과 취약계층을 위한 무료 프로그램 ‘천연염색과 미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운영 중이다.
천연염색은 단순히 색을 칠하는 행위가 아니다. 섬유 속 ‘비정부위’라는 미세한 틈새에 색소를 침투시키는 정교한 과학적 과정이다. 같은 염료라도 매염제 — 산성(식초·구연산), 알칼리성(잿물·소석회), 금속이온(명반·백반) — 의 종류에 따라 전혀 다른 색이 탄생한다.
쪽(청·남색), 홍화(적·황색), 치자(황색), 감나무(갈·흑색), 오배자(흑색), 소목(적색)… 풀 한 포기, 나무껍질 하나가 저마다의 색을 품고 있다. 현재까지 활용되는 천연염료는 15종 이상이며, 온도 하나, 추출 횟수 하나가 최종 색을 결정하는 섬세한 기술이 그 안에 살아있다.
21세기 환경·건강 트렌드 속에서 천연염색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자연성·친환경성·건강 저항성이라는 강점은 합성염색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가치다. 의류·스카프·화장품·식품 착색료까지 활용 범위도 날로 넓어지고 있으며, 국내 최대 천연염색 기업이 나주에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천연염색박물관 반경 1km 이내에는 나주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통일신라 시대 당나라를 오가던 국제 해상 교통의 거점 풍호나루, 1392년 창건 이래 한자리를 지켜온 나주임씨 대종가, 1520년 임붕이 세우고 문장가 백호 임제가 시를 읊던 영모정,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이름을 따온 기오정. 그리고 3세기부터 7세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조성된 영산강 유역 최대의 복합묘제 고분, 나주 복암리 고분군(1998년 국가사적 지정)이 있다. 인근 복암리고분전시관에서는 34기 무덤방이 원형 그대로 재현되어 마한 시대의 문화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조선 왕조를 설계한 삼봉 정도전이 고려 말(1375~1377) 2년여 유배 생활을 하며 사색했던 소재동 초사(草舍)도 이 일대에 남아 있다. 역사의 굵직한 결절들이 영산강 강변을 따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지 염색 체험 하나를 하고 떠나지 말기를 권한다. 강변을 따라 걷고, 고분 앞에 서고, 정자의 처마 아래 잠시 머물러보라. 장인의 손에서 염료가 만들어지고, 쪽풀이 강변에서 자라고, 후학들이 그 기술을 받아 적는 이 모든 장면이 한 도시가 긴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색깔이다.
천 년 넘게 이어진 쪽빛의 강은, 영산강처럼 굽이치면서도 끊기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다.
문의 : 한국천연염색박물관(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백호로 379, 061-335-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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