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지붕을 허물었지만, 역사는 무너지지 않았다. 옛 화남산업, 일제강점기 아픔과 나주곰탕의 시작을 함께 품고 있는 근대산업유산이다. 사진=송서화
베트남 작가 하이뚜가 ‘영산강 국제 설치미술제’에 참여하며 그린 이 작품은 전쟁의 피해자인 소들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슬픔을 머금은 소의 눈빛은 전쟁이 남긴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전하며, 그 곁을 감싸는 소나무·달·구름의 이미지는 치유·평화·희망을 상징한다. 절제된 화면 속에 담긴 깊은 메시지는 관람객들에게 긴 여운과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사진=나주시 문화관광과
나주곰탕. 사진=송서화
(구)화남산업. 사진=송서화
길에서 본 화남산업 굴뚝과 뼈대만 남은 건물 지붕. 사진=송서화

남산공원과 나주천, 동점문 인근을 걷다 보면 조용히 세월을 견뎌온 ‘구 화남산업’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옛 모습을 간직한 근대산업유산이지만, 이곳에는 나주의 아픈 역사와 삶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

1916년 일본인 다케나카 신타로는 나주에 일본군 군수용 통조림을 생산하는 공장을 세웠다. 당시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대규모 통조림 생산시설을 운영했고, 나주는 호남의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이자 전국적인 우시장이 형성된 곳이어서 공장 입지로 선택됐다.

군용 통조림에 사용할 고기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소들이 나주로 모여들었고, 매일 200~300 마리,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하루 400 마리에 달하는 소가 도축됐다. 공장 주변 주민들은 노동자로 동원됐으며, 공장 앞을 흐르던 재신천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을 만큼 이곳은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었다.

광복 이후 공장은 고종석 씨에게 불하돼 ‘대동식품공업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나주의 특산품인 황도복숭아 통조림을 생산했고, 이후 ‘화남산업’으로 운영되면서 지역 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다.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김치 통조림을 생산해 파병 장병들에게 공급하는 등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역할을 이어갔다.

이곳은 나주를 대표하는 향토음식 나주곰탕의 탄생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소머리와 뼈, 양지, 내장 등은 당시에는 상품 가치가 높지 않은 부산물이었다. 공장에서는 이를 버리지 않고 노동의 대가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사람들은 이 재료를 커다란 가마솥에 오랜 시간 푹 고아 국을 끓였다. 깊고 진한 국물에 얇게 썬 소고기를 올려 장터를 찾는 상인들과 여행객들에게 판매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주곰탕이 탄생했다.

특히 나주는 조선시대부터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우시장과 오일장이 열리던 상업의 중심지였다.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뜨겁고 든든한 곰탕 한 그릇은 허기를 달래주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나주곰탕은 세월이 흐르면서 나주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나주곰탕은 홍어회·장어구이와 함께 나주의 3대 별미로 꼽힌다. 맑고 깊은 국물과 담백한 맛은 수십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조리법과 정성이 만들어낸 나주의 자랑이다.

나주에는 ‘모양은 전주요, 맛은 나주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그만큼 나주는 예부터 풍요로운 나주평야와 영산강을 바탕으로 음식문화가 발달한 고장이었다.

구 화남산업을 둘러본 뒤에는 금성관·나주목 관아·나주읍성·나주천 산책길을 거쳐 나주곰탕 거리에서 따뜻한 곰탕 한 그릇을 맛보는 여행을 추천한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본 뒤 마주하는 곰탕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나주 사람들의 지혜와 삶의 이야기를 담은 한 그릇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주의 관광은 아름다운 풍경만을 만나는 여행이 아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문화와 음식으로 이어온 도시의 이야기를 만나는 여행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는 언제나 따뜻한 나주곰탕 한 그릇이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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