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원도심을 걷다 보면 금성관과 정수루를 지나 곧바로 곰탕집들이 늘어선 거리와 마주치게 된다. 이 근접함은 우연이 아니다. 나주읍성은 고려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전라도를 대표하는 고을로, 조정이 전국 주요 지역에 파견한 목사가 다스리던 곳이었다. ‘작은 한양’, ‘소경’이라 불릴 만큼 호남 행정·문화·경제의 구심점이었던 이곳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며, 동점문을 비롯한 사방의 성문과 목사의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 사신과 관리들이 묵던 객사 금성관까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나주곰탕의 뿌리는 이 행정 중심지의 그늘 아래서 자라났다. 나주 오일장에서 상인과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던 국밥 한 그릇이 오늘날 나주 삼미(三味)의 하나로 꼽히는 곰탕의 시작이었다. 소뼈를 오래 고아 맑게 우려낸 국물에 머리고기와 목살, 사태를 넣어 낸 이 음식은 화려한 반가의 상차림이 아니라, 저잣거리를 오가던 이들의 생계와 이동 속에서 빚어졌다. 오랜 세월 대를 이어온 노포들이 지금도 곰탕거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거리가 단순한 먹자골목이 아니라 읍성이라는 행정 공간과 오일장이라는 서민 경제 공간이 맞닿았던 접점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금성관과 정수루 코앞에 곰탕집들이 자리 잡은 지금의 풍경은, 그래서 목사고을의 권위와 저잣거리 서민의 삶이 한 골목 안에 나란히 새겨진 모습으로 읽힌다. 성곽 안에서는 조정의 명이 전해지고 사신이 오갔다면, 그 담장 밖 저잣거리에서는 백성들이 장을 열고 뜨거운 국밥으로 하루를 버텼다. 나주읍성이 나주의 격을 보여주는 유산이라면, 나주곰탕거리는 그 격 아래 살아온 사람들의 생활사를 증언하는 유산이다.
도시재생 사업으로 읍성권과 곰탕거리가 함께 조명받는 요즘, 이 두 공간을 따로 떼어 소개하는 방식은 나주의 절반만 보여주는 셈이다. 천년고도의 위엄과 저잣거리의 온기가 한 골목에서 만나는 도시, 그것이 나주가 다른 고도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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