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버린 무자비한 산불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온 마을이 두려움에 떨던 그 시간,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술로도 막을 수 없었던 불길이 하늘에서 내린 단비 한 줄기에 잠잠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이제는 흐린 회색빛 하늘마저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그 깨달음이 비와 함께 마음속에 스며듭니다.

산불이 휩쓸고 간 그 절망적인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불이 닿지 않은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벚꽃들이 바람에 살랑이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마치 세상의 한쪽이 아픔을 겪는 동안에도 다른 쪽에서는 생명의 축제가 계속된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말입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마주한 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주변의 자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산불로 모든 것이 멈춘 것만 같았지만, 사실 자연은 멈추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각자의 역할을 담당해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무심함 앞에 우리는 한없이 숙연해집니다.

산불이 남긴 검은 흔적 위로 내리는 봄비는 마치 우리의 교만함을 씻어내는 듯합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말입니다.

먼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우리는 자연과 하나 됨을 느낍니다. 그 바람은 불에 타버린 산자락을 지나, 새싹이 돋는 들판을 스쳐, 우리에게까지 도달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시간 동안 자연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끊임없이 속삭여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저 듣는 법을 잊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푸른 하늘과 맑은 물, 비옥한 토양이 있어 우리의 삶이 가능했음을,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손에 의해 오염되고 황폐해질 때 우리 자신의 미래도 함께 위태로워짐을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이 존재해야 우리도 존재할 수 있음을, 자연을 보호해야 우리도 보호받을 수 있음을. 피어나는 꽃망울에서, 흐르는 계곡물에서,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서 우리는 자연과의 깊은 연결을 느낍니다.

산불의 아픔을 딛고,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산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두려움만이 아닌, 경외와 공존의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자연의 상처는 곧 우리의 상처이며, 자연의 회복은 곧 우리의 치유가 됩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발 딛는 땅이 모두 자연에서 왔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나’와 분리된 ‘그것’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과 사람은 하나, 이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오늘도 봄날의 햇살 아래 감사함으로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우리의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