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따라 가는 길이 한쪽은 차도, 한쪽은 자전거도로로 형성된 영산강 강변길. 자동차도로는 광주 끝자락 승촌보로 들어와 무안 몽탄 너머까지 드라이브코스로 즐길 수 있다. 자전거길은 광주천길이나 황룡강길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인데, 강둑을 타다 둔치로 내려가다를 반복하는 묘미가 제법 감미롭다. 군데군데 인공 데크길도 나름 운치 있고, 좁다란 시멘트 포장길도 그때그때 보수를 해서 동호인들의 애정을 받는다. 그렇게 무안 몽탄나루까지 무사안전한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마냥 한가로운 강변길은 길고 긴 거리만큼 감흥이 명쾌하게 다가온다. 짙푸른 억새 이파리 사이를 돌아나와 삐죽 나온 금잔화를 걷어차는 바람은, 강물 위를 스치는 들새들의 날개에 앉아 날아간다. 살아있다. 다행이다. 하지만 영산강이 스스로를 정화하던 시절에는 훨씬 더 생동감이 강했다. 훨씬 더 따뜻했고, 온화했으며 정겨웠다.
아마도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갠지스, 황하, 그런 이름들을 머릿속에 새길 때였을 거다. 한강·금강·낙동강·영산강이 한국의 4대강으로 한반도 문명을 역사에 새기는 발상지라 알게 된 것은. 그렇게 문명에 대한 깨우침을 하나둘 엮어나가는 사이, 나주군 왕곡면 자락 영산강 한 켠이 내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한 살밖에 많지 않은데 체구는 나보다 훨씬 컸던 삼촌이 옆집 아재랑 함께 ‘개양조개’ 잡으러 가자고 했다.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 있다가 ‘개양조개’, 그게 뭐냐고, 어떻게 생겼냐고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귀찮다는 듯이 가보면 안단다. ‘개양조개’, 분명히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나중에 10년도 더 넘게 커서 불현듯 그 말이 떠올랐고, ‘그냥조개’를 그렇게 부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중에 어른이 돼서 알고 보니 ‘그냥조개’도, ‘개양조개’도 아니라 ‘재첩’이었다. 삼촌은 혹시 순간 생각이 안 났거나, 정식 명칭을 몰랐거나, 그냥 예전부터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 따라서 그렇게 불렀을 ‘개양조개’. 재첩이라는 딱딱하고 왠지 어려운 어감보다 은근슬쩍 넘어가 굴렁쳐 돌돌 말아가는 듯한 ‘개양조개’는 영산강 모래밭 모래알만큼이나 어감이 보드라운 감촉이다. 따스하고 달콤하다.
대소쿠리 큼지막한 거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덩치 큰 삼촌이 ‘당글개’ 하나 어깨에 더 짊어지고, 셋이서 영산강 개양조개밭을 향해 논둑길에 올랐다. 얼마쯤인가부터 콧노래를 장전하고 흥얼거리며 걸었다. 저 높이 머리 위에 훤칠한 늦여름 하늘이 파랗게 열려 있었다. 화정댁네 담벼락을 돌다가 “바로 저거야~” 하고 아재가 개양조개 껍데기를 손가락으로 짚어줬다. 아, 저거구나. 장독대 한쪽에 10센티 높이 무더기로 쌓여진 개양조개 껍데기는 주검이 아니라 보슬보슬하니 구슬 같고 보석 같았다.
‘터진목’ 지나 들판을 가로지르는 동안 메뚜기도 야무지게 한 줄 꿰어졌다. 강아지풀 꽃대는 메뚜기 사냥용에 정겹게 어울린다. 강가에 다다르니 기다렸다는 듯 강바람이 온몸을 휘감아 돈다. 이제 시작이다. 고무신 챙겨놓고, 바지 걷어붙이고, ‘당글개’를 확인하는 삼촌들. ‘당글개’, 그래 그때는 분명 그렇게 불렀다. 촘촘하게 철사로 소쿠리를 만들어서 가운데로 긴 대나무 장대를 연결하고, 모래밭에 박아 넣은 소쿠리가 끌어당겨도 틀어지거나 물러 터지지 않도록 단단히 조여 놓은 구조물이다. ‘개양조개’ 잡을 때 모래더미에 쳐박아 당겨서 잡으니 당기는 장비, 말마따나 그냥 ‘당글개’다. 언어에 제법 자신감이 생긴 때에 생각해 봐도, ‘당글개’ 그 이상 붙일 좋은 이름으로 마땅한 게 없었다. 그 숭글숭글하고 성건진 이름, 어쩌면 그리도 대견스러운지, 참으로 잘 붙인 작명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당글개’는 덕석 위에 널려진 보리·조·옥수수 등 곡식을 햇볕 아래 뒤집어 펼치는 나무끌개도 ‘당글개’라고 했다. 아무려면 어떤가. ‘당글개’도 ‘개양조개’도 순전히 우리 가슴 속에서는 시골 내음 제대로 즐길 레트로 명작들로 남으면 그만이다.
물속 모래밭 물질, 가로 약 50×세로 40센티의 당글개질 서너 번이면 한 소쿠리 찬다. 꽤 많이 올라왔다. 두 소쿠리 반쯤 해서 작업을 끝낸다. 삼촌들이 한 소쿠리씩, 나머지가 내 몫이다. 더 이상 안 잡는다. 왜? 무거워서 들고 가지도 못하니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할 일이 더 남아 있다. 모래밭에 눕는 일이다. 오래 눕지 않는다. 따가운 햇살 때문에. 일광욕이 아닌 모래욕을 하고 강물에 뛰쳐든다. 강물에 뛰어드는 순간의 상큼한 희열이 용천혈을 타고 짜르르 올라온다. 모래욕 두어 번에 장난기가 발동하면 괜히 삼촌들만 힘자랑한다. 넘어지는 건 내 몫이고, 얼결이었지만 그래, 그때 물을 먹었지. 코로 물을 먹었어. 먹어도 배탈 같은 거 없었다. 강물인데 재첩이 살던 물이니 얼마나 단정하고 정갈했겠는가. 영산강이 그랬다. 그 시절엔. 햇볕에 물기가 마른 피부는 상큼하고 개운했다.
물 밖 모래톱. 강모래도 어쩌면 그리 하얬던가 모르겠다. 약간의 붉은 빛에 새하얗게 얹혀진 가루들이 반짝반짝. ‘반짝이는 금모래’가 따로 없었다. 지금도 가슴 언저리를 가득 메우는 회억의 중심엔 영산강 개양조개 잡던 그리 넓지 않은, 사초들이 빙 둘러 서서 멱감는 알몸을 파수하던 모래밭이 펼쳐진다. 바람 한 줄기 지나가면서 햇살을 조각낸다. 새똥 얹힌 풀잎도 햇살 조각 물고서는 초연하게 싱그럽다.
그러니 영산강에 인어가 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으나, 아름다운 인어는 긴 머리카락 휘날리며 허리 아래 비늘을 번쩍이고, 손에는 피리를 들고 앙암바위 아래 폼 나게 비스듬히 앉아서, 오가는 악동들의 심장에 하트를 꽂아주고 있었다. 앙암에서는 비 오는 날 공룡처럼 큰 구렁이 두 마리가 엉켜서 희롱하듯 놀다가 사라진다는 어마무시한 얘기가, 이상케도 그 당시엔 은하철도999 영상처럼 시공을 넘나들었다. 앙암바위 아래 깊은 물에 연례행사처럼 사람 목숨이 희생되어도 무서울 필요가 없었다. 로렐라이 언덕이 영산강 길고 긴 굽이에도 하나쯤 있어, 인어공주가 왕자님 그리우면 슬며시 피리를 꺼내 불어대니, 귀를 쫑긋 잘 열고 있어야 한다고들 했다. 거기에 빠지면 혼이 나간단다. 그래봤자 강을 눈에 심고, 강을 향해 들어가고, 강과 일체가 되는 날에는 나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없어도 됐던 것이다. 인어가 그렇게 영산강에 살고 있었던들,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순수가 있었으니까. 정말 그랬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반백 년도 훨씬 넘어가니 영산강이 변했다. 물빛이 황소 등허리마냥 누렇게 뜨고 때로는 창백해진다. 강물 위를 신나게 잠자리처럼 날아다니던 바람 소리도 예전의 소리가 아니다. 들판에 선 거대한 송전탑 가랑이를 헤집고 가다, 아파트 밀림 사이를 기어나오는 고통에 애달파졌다. 둔치에 길고 긴 데크길을 내고, 트럭째 실어와 꽃을 심어도 그때뿐, 강의 숨결은 늘 피곤에 지쳐 있다. 바람엔 냄새만 있지 향기가 없다. 그러니, 지금은 아닌가 보다. 강가에서 오늘 아무리 세레나데를 불러도 인어공주는 기척도 하지 않는다. 강바람이 산들거리며 비를 불러 앙암바위를 서성여도 덩치 큰 구렁이도 오간 데 없이, 무심하고 냉랭하다.
중요한 것은 내일이다. 영산강 물길 바깥에서는 호화찬란하게 꽃들이 춤을 춘다. 물길 안으로 들어가도, 사이렌이 정신을 혼미하게 하든, 앙암 구렁이가 조금은 무서워지든, 그런 일은 상관없다. 다만, 우리 아이들이 인어공주와 함께 꿈을 꾸고 노래하며 춤추는 내일이면 된다. 상실을 견디고 마침내 내일은 영산강에 인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가없는 희망을 심기 위해 나도 고요히 침잠(沈潛)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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