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편제의 본고장으로서 나주 출신 명창과 국창을 찾아 나서는 두 번째 여정으로 공산면 흥복마을을 찾았다.
양암 정광수(1909~2003) 명창은 나주시 공산면 복용리 흥복마을 출신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무형문화재(판소리 수궁가)로 지정된 당대 최고의 명창이었다.
정광수 명창은 고향의 넓은 평야에서 농부들이 추수를 마치고 황소 등에 올라타 흥겨운 토속요를 부르던 전통을 바탕으로 ‘추수풍년가’와 ‘가요송가’를 직접 작사·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농경사회의 정서를 담아내며, 효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을 어귀의 사계절 푸른 소나무를 보며 기상을 키웠던 그는 한학과 서예에도 능통했다. 180cm의 훤칠한 키와 시원한 이목구비, 기개 있는 풍채를 갖춘 그는 판소리계에 큰 획을 그으며 한 시대를 빛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판소리를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토로하며, 애국애족의 정신을 담아 민족의 기상을 노래했다.
흥복마을은 예로부터 참돌(眞石)과 황토흙이 섞인 비옥한 토지 위에 자리 잡았으며, 마을 곳곳에서 게르마늄이 풍부한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명천(名泉)으로 불리며, 방울샘이라 불리는 이곳의 물을 마시면 목소리가 아름다워진다고 전해졌다. 이 때문에 방울샘은 명창과 국창들이 득음을 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일제는 마을의 정체성을 없애고자 행정지명을 ‘흥복’에서 ‘신동산’으로 변경했으나, 마을 주민들은 2005년 전라남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신동산 흥복’으로 환원했다.
정광수 명창의 생가터를 찾기 위해 나주 공산면 행정지원센터를 방문해 면장을 만나고, 마을 주민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과정을 거쳤다. 몇 시간을 헤매며 어렵게 도착한 마을회관 앞에서 지나가던 마을 주민이 명창의 생가터를 직접 안내했다.
생가터의 현 거주자인 김모 씨(74)는 “정광수 명창의 생가터는 현존하는 기와집으로, 조부 때 매입해 40여 년 넘게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부녀회장 김모 씨는 “정광수 명창이 먹고 자랐던 방울샘의 물을 마시며 제2의 정광수 명창이 탄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나주시는 정광수 명창의 명성에 걸맞게 생가터를 복원하고, 주변의 빈집을 매입해 주차장을 조성하는 등 행정적인 지원을 통해 ‘제2의 정광수 명창’이 탄생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