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출신 판소리의 거장 김창환 흉상 (사진 홍각희)
김창환 명창 추모비. 사진=홍각희

나주가 낳은 판소리 명창을 찾아 떠나는 세 번째 여정은 김창환 국창의 발자취를 따라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면 대산리 대야마을로 향했다. 이 마을은 과거에는 나주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광역시에 속한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는 김창환 국창의 기념비와 흉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념비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김창환 국창은 1854년 광산군 삼도면 내산리에서 태어나 명창 정창업에게 판소리를 사사받았다. 서편제 창법의 대가였던 그는 특히 ‘흥보가’ 중 ‘제비 로정기’를 뛰어나게 불렀다. 1800년대 말, 그의 뛰어난 재능은 인정받아 중추원 의관(정5품)에 임명되었고, 1902년 고종의 칙령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인 원각사의 주석을 맡아 전국 명창 200여 명을 이끌었다.

1907년에는 협위사를 조직하여 삼남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쳐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1939년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비문에 기록된 대로 1902년 원각사의 주석을 맡았던 사실은 그가 판소리계의 거장이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1907년 협위사를 조직하여 삼남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한 것은,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광산문화원 윤원철 사무국장은 “매년 김창환 국창 기념비 앞에서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나주문화원장도 참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을 주민 김모 씨(84세)는 “김창환 국창은 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고대유 전 광산구청장 재직 당시 현재의 묘소로 이장하면서 비석도 세웠다”고 전했다.

김창환 국창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묘갈명이 새겨져 있다.

“김창환 국창은 민족예술이 핍박받던 시절, 판소리와 창극으로 민족의 슬픔을 달랜 인물이다. 1854년 광산군에서 태어나 뛰어난 재능으로 국창이 되었고, 최초의 국립극장 원각사 주석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협률사를 조직하여 삼남 지방을 순회하며 민족혼을 고취했다. 그의 예술은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공허함을 채우고 큰 감동을 주었으며,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창환 국창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민족혼을 고취한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의 예술적 업적과 민족에 대한 헌신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