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멩이 하나도 회장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어요. 그 시절 나주잠사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따뜻한 울타리였습니다.”
1970 년대 호남비료·화남산업과 함께 나주 경제의 부흥을 이끌었던 ‘나주잠사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인 1910 년 설립 이래 호남 최대 규모의 명주실 생산 시설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나일론 등 화학섬유의 확산으로 1970 년대 후반 양잠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큰 타격을 입었고, 우여곡절 끝에 버텨 오다가 1994 년 최종 폐업의 길을 걷게 됐다.
나주시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과 근대 산업의 역사가 공존하는 이 폐산업 시설을 보존하고 활용하고자 문화체육관광부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공모사업’을 추진했다. 단순히 건물을 허무는 대신 57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리모델링과 개축을 거쳐, 오늘날 주민들을 위한 문화예술 창작·향유 공간인 ‘나빌레라 문화센터’로 재탄생시켰다.
시민 공모를 통해 결정된 ‘나빌레라’라는 이름은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는 과정을 거쳐 결국 나비가 돼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역사적 공간인 옛 나주잠사가 다시 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의 발판으로 변모해 나주가 문화 도시로 힘차게 날아오르길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아픔을 딛고 문화의 날개를 펼친 공간에, 과거 나주잠사에서 관리자로 근무했던 산증인이자 올해로 11 년째 나주를 지키며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인 정연수(77) 씨가 지난 24 일 나주잠사를 다시 찾았다. 그에게 잠사가 품었던 찬란한 산업의 역사와 그 안에 스민 인간미 넘치는 에피소드를 직접 들어보았다.
다음은 정연수 문화해설사와의 일문일답이다.
Q. 1970 년대 당시 나주잠사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저는 원래 여주에 있는 잠사연구실에서 근무하고 있었어요. 당시 나주잠사 회장이셨던 김용두 회장님의 둘째 아드님이 서울시립대에서 잠사학을 전공하셨는데, 실습을 나온 저를 좋게 보시고 “우리 집에 공장이 있는데 한번 와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죠. 그렇게 먼 길을 찾아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당시 1970 년대만 해도 90% 이상을 일본으로 수출하며 호황을 누렸고, 특별 보너스가 나올 정도로 활기가 넘쳤던 곳이었습니다.
Q. 규모가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출퇴근 시간대 풍경이나 일상은 어땠나요?
A. 직원만 250 여 명에 달했고, 3 교대로 돌아갔습니다. 집이 먼 직원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가까운 곳의 여공들은 출퇴근했어요. 특히 퇴근 시간이 되면 공장 앞은 청년들로 북적였습니다. 인근 호남비료 총각들이 공장 앞에 와서 서성거리며 미팅을 하기도 하고, 함께 월출산으로 산악회 모임을 가기도 했죠. 저도 그렇게 산악회 활동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으니, 제 인생의 소중한 인연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Q. 김용두 회장님에 대한 기억이 아주 남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셨나요?
A. 회장님은 종업원들을 대할 때 마치 ‘친자식’처럼 아껴 주셨어요. 구두에 먼지가 묻으면 “야, 닦을 사람 없냐”며 농담을 건네시고는 용돈을 쥐어 주시며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으라고 다독이셨죠. 공장 밥을 마다하고 회장님 드시는 밥을 같이 먹을 정도로 가족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1976 년쯤 회장님이 돌아가셨을 때, 제가 직원 대표로 조사를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공장의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회장님의 손길과 따뜻한 인품이 배어 있었습니다.
Q. 안내판에는 나오지 않는, 잠사 주변의 숨은 풍경이나 이웃들의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A. 겨울철이면 잠사에서 번데기를 삶아내곤 했습니다. 그때 나오는 뜨거운 물을 나주천으로 흘려보냈는데, 그 물이 차가운 물과 만나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렸죠. 물이 깨끗하고 따뜻하다 보니 동네 어머니들이 그 물을 이용해 나주천에서 빨래를 하셨어요. 추운 겨울날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며 이웃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 풍경은, 차가운 공장 물을 ‘따뜻한 온기’로 바꾸어 놓았던 나주만의 정겨운 문화였습니다.
Q. 나주는 천년고도임에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고 근대화 시기 중심지 지위를 내어주게 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배경을 어떻게 보시나요?
A. 맞습니다. 나주는 넓은 평야지대인 만큼 먹거리와 자원이 풍부해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죠. 하지만 그만큼 풍요로웠기에 변화를 싫어하고 “내 것을 지키려는 속성”과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호남선 철도가 개통될 당시, 나주의 유림과 지주들이 “조상의 묘소를 훼손하고 지기가 끊긴다”며 철도 부설을 반대하는 바람에 노선이 광주와 송정리 쪽으로 우회하게 됐습니다. 그 선택이 결국 근대화 시기 나주가 성장의 중심지 자리를 광주에 내어주고 발전이 정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두려워하고 지키는 것에 치중했던 아쉬운 대목입니다.
Q. 1994 년 최종 폐업 이후 오랜 방황을 거쳐 지금은 ‘나빌레라 문화센터’로 변모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A.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 나비가 되어 날아오른다는 의미의 ‘나빌레라’라는 이름처럼, 방치되었던 공간이 문화예술의 장으로 바뀐 것은 참 다행이고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큽니다. 당시의 소중한 기계들이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더 많은 이들에게 교육과 체험의 장으로 활용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 그 당시 기계들이 남아 있을 때 직접 잠사 체험을 하며 비단실을 뽑아보고, 이것이 나주의 천연염색박물관과 어우러졌더라면 많은 이들에게 체험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일본의 한 작은 마을이 오직 ‘요괴의 거리’라는 스토리텔링 하나로 전국적인 관광지가 된 것처럼, 우리도 가진 소중한 자원을 더 가치 있게 살려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Q. 문화해설사로서 탐방객들과 후세들에게 나주잠사를 어떻게 기억해 주길 바라시나요?
A. 나주는 예로부터 비단이 유명하고 풍족한 고장이라 사람들의 마음씀씀이도 넉넉했습니다. 나주잠사는 단순한 일제강점기의 수탈이나 근대 산업의 흔적에만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그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이웃과 정을 쌓았던 ‘우리네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이 그 따뜻했던 역사와 사람 냄새를 오래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