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뽀오옥, 뽀옥!!!.”
힘차고 거침없는 출발신호였다. 출발선에 서면 언제나 두근두근 가슴이 설렜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보내게 될까. 해질녘 영산강변을 달릴 때도, 별을 따라 밤길을 달릴 때도, 무섭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증기기관차 ‘미카 5-31’호는 그렇게 말하는 듯 멀찌감치 서 있다.
“치이익 포옥”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쉰 목소리는 허기진 거 마냥 힘이 빠진 ‘미카’가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소리다. 댕겅 목 잘릴 판에 무슨 신이 났으랴. 한때 ‘꾸웨엑’하고 돼지 목 따는 소리도 음악처럼 즐기듯 내지르던 ‘미카’는 화통을 삶아 먹지 못해 이제는 기력을 잃은 채 구석 한켠에 몰려있다. 그래도 풍채는 육중해서 예전의 당당함이 서려 있다.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것처럼 제법 호기롭지만, 사람들은 곁을 스치며 애처로움을 달랜다. 바람 앞에 의연한데, 실상은 고철덩어리로 먼지만 덕지 눌러 붙었다. 젓가락같은 철길 두가닥은 흙에 묻혀 방향을 잃었다. 거대한 조경수를 옆에 낀 ‘미카’ 옥외전시장의 한가하고 처연한 모습이다.
영산포역 광장 입구, 화려한 아치를 지나면, 추억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전시장과 아기자기한 실내 어린이기차탑승 체험관을 만난다. 역 선로쪽으로 들어가도, ‘호남선 열차’하면 왠지 애절하고 가슴설레게 했던 느낌으로, 야외 레일바이크를 탈 수 있다. 월요일 휴무, 1일 3회 운행하는데 우천, 강풍, 동절기에는 제한이 있다.
영산포역은 구도심의 나주역보다 컸다. 최고의 특급열차였던 새마을호가 정차하던 곳이었다. 경부고속철도 1단계 개통에 맞춰 호남선에도 고속열차를 운행시킬 계획이었다. 기존선로의 직선화 개량공사가 꼭 필요했기에, 나주역과 영산포역의 중간 지점인 현재의 나주역으로 통합된,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영산포역의 정지, 2001년 7월13일의 일이다. 1913년 7월1일 ‘간이역’이 아닌 ‘보통역’으로 출발한지 88년12일만의 퇴역이었다. 이제는 나주시 영산동에 영산포역철도공원으로 존속하게 됐고, 전시동이나 체험동은 1984년의 3세대 역사(驛舍)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철도와 기차는 근대문명의 상징이다. 철도역이 들어선다는 것은 물류의 중심지라는 의미다. 1913년이면 일본제국주의 발호가 기세를 올리던 시절이고, 호남의 풍부한 농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려던 일제의 계산에 영산포가 적지로 꼽혀 성장했다. 동양척식회사문서고가 그러한 상황을 증빙이라도 하듯, 영산포역 강 건너 맞은 편에 덩그라니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영산포역사의 얼굴은 본래 지금 모습과는 반대로, 1960년대 2세대 역사 리모델링 때, 앞뒤를 바꾸고 광장을 내었다. 일제는 한시라도 빨리 수하물을 일본으로 나르기 위해 수탈의 효율성만을 목표로 역을 조성한 때문이었다.
조선후기 주요도시 중 인구 5,000명의 도시 49곳 중의 하나로써, 강과 바다를 이용했던 나주는 영산강으로 인해 호남의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었다. 당시 수운을 운영하던 조선의 도시 10개 중 전라도에는 나주가 유일했고, 그 중심에 영산포구의 영산창(고)가 있었다. 호남을 대표하던 영산창은 조운선이 53척이나 됐고, 매년 3만석 가량의 세곡을 운송할 정도였다. 영산창 관할 구역이 17개 고을이어서, 많은 곡식을 한 번에 다 처리할 수 없어 몇 번에 나눠 실어 나를 정도였으니,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다 없어지고 낡기는 했지만, 당시 한창 붐비던 영산포 전성시대의 물류창고였던 소금창고가 3동쯤 지금도 빨간 함석으로 지붕과 벽체를 단단히 두르고 있다. 설명이 없이, 혼자 걷는 관광객은 지나치기 쉽다. 그 장소가 그 스토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강둑을 경계로 삼아, 황포돛배는 강쪽, 창고는 마을쪽이다. 기막힌 역사의 한 쪽을 망연히 쳐다보며, ‘과거가 미래를 살려’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영산포역의 역사적 흐름을 지켜봐 왔다는 시민 Y씨는 “정치하고 행정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영산포의 흥망성쇠가 좌지우지 돼왔다. 앞으로도 공무원들의 행정력이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을 잘하나 못하나 월급 받는데 지장 없겠지만, 침체된 영산포 발전에 좀 더 적극적으로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며, “시민들도 관심을 많이 가져 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영산포는 영산강이 강변에 붙여놓은 유일한 행정도시다. 지류가 아닌 본류에 조성된 도시치고, 유명한 도시, 거대한 도시, 세계적인 도시들은 다들 강을 끼고 발달했는데, 영산포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 나주시에 영산포라는 행정구역, 행정지명은 없다. 다만, 현지 동네사람들, 나주사람들이 현재에도 마치 삶의 원천인 듯, 스스럼없이 영산포라는 명칭을 즐겨 쓴다. 영산동, 영강동, 이창동에 있는 가게들 간판 한 귀퉁이에는 ‘榮山浦’(영산포)라는 문자로 기호화해 놓았다. 역사와 추억을 알면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깨알관광거리로 남았다.
영산포는 영산강의 포구여서 붙여진 자연발생적 명칭이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말 왜구의 잦은 출몰로 영산도(흑산도 지역의 작은 섬) 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영산현으로 불렸고, 포구이름이 영산포가 됐다고 한다. 영산강이라는 명칭도 시간차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와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고려초 사람들은 영산강을 금강이라고 했다는 데서 추정할 수 있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고려초부터 영산포는 조운, 조창이 발전된 곳이었고, 조선시대도 한양까지 세곡의 집산과 운송의 전초기지로써 중요한 물류기지였다. 뱃길이 사라진 것은 1970년대 목포에 하구언이 생긴 뒤부터였으니 불과 50여년 전이다. ‘50년 전’하면 먼 시간 같은데, 하구언 생긴지는 엊그제같이 느껴진다.
영산포철도공원의 대합실을 지나 선로쪽 레일바이크가 있는 곳, 비가림지붕에서 북쪽으로 KTX가 우렁차게 터널 통과하는 걸 볼 수 있다. 터널이 생긴 그 야산 연장선상에 나주의 호남최초 의병장 건재 김천일 선생의 묘소가 있다. 건재 선생 사당인 정렬사와는 별개다. 건재 선생 탄생 이틀만에 생을 달리한 어머니, 양성이씨 선산인데, 도보 10분거리다. 왜 거기에 묘소가 있는지부터 이런저런 사연을 챙기다보면, 역사학도가 아닌 관광객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출입에 특별한 제한이 없는 이때가 기회다.
공원역에서 다리 건너 도보 5분거리에 홍어거리가 보인다. 뱃길이 사라져, 영산도의 홍어가 적당히 삭혀져 영산포에 도착하는 일이 없어졌다. 자연발효된 흑산도의 영산포홍어는 사라지고, 그동안 터득한 발효기술로 영산포홍어거리의 명장 점주들이 고객을 맞이한다.
홍어거리와 등을 맞대고 청년창업1번지 죽전골목이 있다. 죽과 전의 골목이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영산포역사박물관이 30미터 근처다. 영산포등대도 코앞에 있다. 200미터내에는 일본인지주가옥, 500미터 정도면 영산강들섬꽃단지와 영산강정원까지 연결된다.
영산포읍 전환을 위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영산포읍의 정체성이 새롭게 정립될 것이다. 둘레둘레에 역사적 관광요소들이 모여있으니, 기왕 온 관광이라면 시간 조정을 해 영산포 전부를 뜯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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