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장날에 잘 갈아놓은 낫을 손에 쥐고 감나무 과수원에 섰습니다. 기계의 도움 없이, 오직 두 손과 낫 하나로 시작하는 원시적인 제초작업. 감나무들이 하루라도 빨리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에 서툰 낫질이지만 점점 속도를 더해갔습니다.
한 포기씩 잘려나가는 잡풀들 사이로 감나무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고, 억눌렸던 대지의 숨결이 서서히 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깨끗하게 정리된 과수원을 바라보는 뿌듯함도 컸지만, 무엇보다 잘려나가는 풀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뿜어내는 그 진한 생명의 향기가 싱그러운 녹색의 숨결이 되어 코끝을 스치며 전해주는 자연의 선물에 황홀해졌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른 채 낫질에 몰두하다가, 잠시 밭두렁에 주저앉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식혔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깨끗한 과수원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혼자서 이렇게 감나무들을 위해 제초작업을 한 것이 언제였던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처음 이 땅에 감나무를 심던 그날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습니다.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이건 할아버지 나무, 이건 작은아빠 나무, 이건 엄마 나무, 이건 아빠 나무”라며 저마다의 감나무를 정하고 작은 묘목을 심던 그 따스한 오후. 앞으로 매년 이곳을 찾아와 정성스럽게 돌보고, 가을이면 탐스럽게 익은 감을 따서 나누어 가지기로 했던 그 소중한 약속들.
그리고 지금, 그때 심었던 작은 묘목들이 거대한 나무가 되어 내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수많은 계절의 시련을 견뎌내며 매서운 겨울바람도, 무더운 여름 가뭄도, 갖가지 병충해의 위협도 묵묵히 이겨내고 해마다 변함없이 달콤하고 탐스러운 열매를 선사해준 이 고마운 생명들.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감나무가 자라온 이 모든 시간이 바로 내가 살아온 인생의 궤적과 나란히 흘러왔다는 것을. 감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가지를 뻗어 열매를 맺어온 것처럼, 나 또한 삶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세월의 가지를 뻗어 지금 이 시니어의 계절에 인생의 열매를 맺고 있구나.
그동안 삶의 비탈길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때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시련들을 하나하나 헤쳐나온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들과 함께 엮어온 거대한 삶의 직조물이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라는 별 위에서 숨 쉬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 하늘을 나는 새들, 땅을 기어가는 벌레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 그리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열매 맺는 나무들까지,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살리고 있구나. 이런 깨달음이 가슴 가득 밀려오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래, 나도 이 우주적 생명의 교향곡 속에서 나만의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소중한 존재구나. 지구별의 한 생명으로서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감나무 아래에서 느끼는 이 벅찬 감사의 마음을 가슴 깊이 새기며, 나는 다시 낫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