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우미옥

나주의 금성관에 들어서서 왼쪽을 바라보면 많은 돌 비석들이 마치 천년을 함께 살아낸 한 가족처럼 옹기종기 자리하고  서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높이 100cm 너비 37.5cm의 작은 돌비석 하나가 눈길을 끈다. 긴 세월의 풍화로 글씨는 대부분 지워졌지만, 그 안에 새겨진 역사는 천 년이 지난 오늘도 지워지지 않는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공으로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고려 현종은 이듬해 초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왕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피난처는 나주였다.

태조 왕건이 궁예 휘하 장수 시절 나주를 장악하며 나주 오씨(吳氏) 장화왕후와 혼인해 제2대 왕 혜종을 낳은 곳, 즉 고려 왕실이 대대로 믿어 온 연고의 땅이었다.

1011년 1월 13일 나주에 도착한 현종은 10여 일을 머무른 뒤 거란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왕이 탄 수레를 네 마리 말이 끌고 이 다리를 건넌 데서 ‘사마교(駟馬橋)’라는 이름이 비롯되었고, 조선 효종 2년(1651년) 현감 정지호(鄭之虎)가 다리를 수보한 뒤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

원래 서내동 25-2번지에 있던 이 비는 1968년 현 위치로 옮겨졌으며,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되었다.

사마교비는 단순한 토목 기록물이 아니다. 나주에서 환도한 현종은 나라를 재건하였고, 1018년에는 자신을 품어 준 나주(羅州)와 전주(全州)의 이름을 합쳐 ‘전라도(全羅道)’라는 행정 구역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전라남·북도의 이름 자체가 나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기의 왕을 받아들인 다리 하나가 한반도 지방 행정 역사의 씨앗이 된 것이다.

그 정통성은 조선 시대와 근현대를 거치며 ‘의향(義鄕)’이라는 칭호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봉기, 동학농민운동의 횃불, 그리고 1929년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의 희롱에 분연히 맞선 조선인 학생들의 항거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어 전국으로 번졌다. 나주는 역사의 고비마다 의기(義氣)로 응답해 온 땅이었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인구 9만 명 선이 무너질 만큼 쇠락했던 나주는, 빛가람 혁신도시 조성을 계기로 한국전력공사 등 공공기관이 이전해 오면서 다시 10만 명 고지를 넘어섰다. 

구도심 역사문화의 재생과 혁신도시의 미래가 맞닿는 지금, 천 년 전 왕을 품었던 넉넉함과 불의 앞에 굴하지 않았던 의기야말로 나주가 다음 천 년을 열어 갈 가장 오래된 나침반이다. 마모된 글씨는 사라졌어도, 사마교비가 담은 뜻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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