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전, 남편의 첫 발령지는 완도 보길도였다. 도회지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설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섬살이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짐을 꾸리면서도 마음 한쪽이 괜히 서늘했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난생 처음 넓은 바다를 마주하며 다도해의 작은 섬들을 지났다. 배가 섬에 가까워질수록 말은 아껴졌고, 나는 무의식중에 남편의 옆자리에 더 바짝 붙어 앉았다.

학기 중간 발령이라 학교 관사가 비어 있지 않아, 우리는 부황리 마을 초입의 예쁜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다. 돌담 위에는 인동덩굴과 야생화가 아기자기하게 피어 있었고, 추운 날이면 참새들이 처마 밑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밤이면 뒷마당 우물 속으로 별빛이 쏟아졌다. 두레박을 내릴 때마다 별들이 일렁였고, 그 물로 얼굴을 씻으면 별빛까지 함께 닦아내는 기분이었다.

대문을 나서면 새벽녘의 세상은 언제나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날이 채 밝기 전, 집 뒤쪽에는 하얗게 피어난 유채꽃들이 아침 안개 속에 반쯤 잠겨 있었고, 그 너머로 수평선이 아스라이 번져 있었다. 안개와 꽃과 바다가 경계 없이 스며든 그 풍경 앞에 나는 그저 한동안 말없이 서 있곤 했다. 유채꽃 향이 안개를 타고 푸른 바다의 숨결과 함께 천천히 밀려올 때면,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두근거렸다. 섬살이의 낯섦이 조금씩 부드러워진 것도, 어쩌면 그런 새벽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검게 그을린 손으로 쥐여 주던 보드라운 톳과 묵직한 고둥의 무게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낯선 섬에 내딛는 내 마음을 붙들어주는 다정함이었다. 섬사람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참으로 묵직하게 타인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 주었다.

섬에는 동백꽃이 지천이었다. 지금도 빨간 동백꽃을 보면 그 시절 보길교회에서 열린 소박한 결혼식이 떠오른다. 신부가 조화 부케를 든다는 소식에, 남편과 나는 마을 어귀의 싱싱한 동백꽃을 따서 정성껏 부케를 만들었다. 손끝에 붉은 동백의 온기가 번져왔고, 이상하게도 손끝이 시리지 않았다. 동백꽃 부케를 받아 든 신부의 환한 웃음이 작은 교회 안을 밝힐 때, 우리가 누군가의 인생에 따뜻한 흔적이 된 것만 같아 마음이 벅차올랐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동백의 꽃말처럼, 우리가 나눴던 순간들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질 줄은 몰랐다. 가끔, 그 시절 중학생이었던 남편의 제자가 보내오는 따뜻한 안부는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온기로 가슴을 적신다.

동백꽃이 피는 계절이면 나는 여전히 그 섬 어딘가에 서 있는 것만 같다. 20대 중반, 젊고 서툴렀던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조용히 안아주는 느낌이다. 보길도 부황리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의 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는 가장 따뜻한 뿌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도 나는 캘리그라피 문구 곁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백꽃 몇 송이를 또 틔워낸다. 40년 전 그 섬에서 얻은 온기를 붓끝에 담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서다.

삶이란 결국 지나온 시간 속에서 가장 순수했던 마음을 다시 만나는 여정임을, 동백꽃은 해마다 그렇게 내게 조용히 일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