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영산강변, 이른바 ‘홍어의 거리’에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알싸한 향이 먼저 마중 나온다. 30여 곳의 홍어 전문점이 늘어선 이 거리는 단순한 먹거리 골목이 아니다. 고려 말부터 600년 넘게 이어진 발효 문화의 현장이자, 한때 국내 굴지의 내륙 포구였던 영산포의 마지막 흔적이다. 그리고 이 향기로운 골목에서 3.4km 떨어진 죽림동에는, 같은 날 태어났으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게 된 또 하나의 역이 남아 있다.
삭힌 홍어의 유래는 조선 중종 25년(1530) 편찬된 관찬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려 말 남해안 일대에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지자 국가에서 섬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고, 흑산도 인근 영산도 사람들이 뱃길로 영산포까지 옮겨오면서 자신들이 즐겨 먹던 홍어도 함께 가져왔다. 당시만 해도 해상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뱃길로 반나절 이상, 길게는 보름 가까이 걸렸다. 이 시간이 자연 숙성의 과정이 됐다. 같은 홍어라도 흑산도에서는 날것으로 먹지만, 영산포에서는 숙성해서 먹는 기술로 발전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중 집필한 자산어보에도 나주 인근 사람들이 삭힌 홍어를 즐긴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 지역과 숙성 홍어의 인연이 조선 중기 이전부터 이어져 왔음을 뒷받침한다.
영산포가 홍어의 종착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곳이 오래전부터 호남 최대의 물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창이 설치됐던 영산포는 조선시대에도 호남을 대표하는 영산창이 자리해 조운선 53척이 매년 3만 석 가량의 세곡을 운송할 정도로 규모가 컸고, 관할구역만 17개 고을에 달했다. 조선 후기 인구 5천 명 이상 도시 가운데 전라도에서는 전주, 나주, 광주, 태인, 제주 다섯 곳만 이름을 올렸는데, 나주가 이 대열에 낄 수 있었던 것도 영산강이라는 수운 덕분이었다.
이런 물류 기반 위에서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과 함께 나주에는 역이 두 곳 동시에 문을 열었다. 나주읍성 인근 죽림동의 나주역과, 영산강 포구를 낀 영산포역이다. 불과 3.4km 지척에 굳이 역을 두 곳이나 세운 것은 영산강을 이용한 목포~영산포 간 내륙 해운과의 연계성을 감안한 결정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강의 도시 나주에 육로와 수로가 만나는 관문이 두 개나 필요했던 셈이다.
나주시 죽림동 60-1에 위치한 나주역사(羅州驛舍)는 신축 당시 설계도나 공사 관련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1923년 북쪽 벽에 4평(13.2㎡) 규모의 화물창고가 증축된 것으로 확인된다. 1970년에는 일본식 기와를 골스레이트로 교체하고 건물 외부에 있던 개찰구를 내부로 옮기는 개보수가 이뤄졌지만, 건물의 기본 구조와 골조 목재 등은 신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2000년 12월 2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됐다.
나주역사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건축적 가치를 넘어선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경 이 역 인근에서 나주 통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벌어진 다툼, 이른바 ‘댕기머리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 154개교, 5만4000여 명이 참여한 학생독립운동으로 번졌다. 일제강점기 3대 항일민족운동으로 꼽히는 이 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나주역이다. 1970년대까지 나주읍성과 주변 상권을 잇는 교통의 관문이었던 나주역 앞 죽림동 거리에는 여인숙과 식당이 늘어섰고, 대나무로 유명했던 이 지역 상인들은 소쿠리에 나주 배를 담아 열차 안팎에서 팔기도 했다.
영산포역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개통 직후부터 뱃길과 철길이 교차하는 물류 환승지 역할을 했던 이 역은, 1927년 조선철도연선요람에 따르면 영산포가 교통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우마차 40대와 손수레 70대가 대기할 정도로 화물 운송량이 늘었다. 미곡·면화·누에고치·잡곡·가마니·죽제품 등 각종 농수산물이 이곳을 거쳐 반출됐고, 흑산도에서 뱃길로 실려 온 홍어 역시 이 물류망의 일부였다. 홍어를 실은 배가 영산포 선창에 닿으면 그 자리가 곧 어판장 구실을 했다. 영산도에서 잡아온 홍어와 상인들이 선창에서 직접 거래를 하며 유통이 이뤄졌던 것이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긴 뱃길 위에서 저절로 삭아버린 홍어가 오히려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영산포는 강과 철도가 함께 떠받치는 숙성 홍어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아갔다.
다만 같은 물류망은 수탈의 통로이기도 했다. 1913년 영산포역 이용객 중 일본인 상인의 비중이 45%에 달했고, 13개에 이르렀던 쌀 도정공장의 존재는 이 철길이 조선 농수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데도 쓰였음을 보여준다. 한 역은 항일의 함성을, 다른 한 역은 수탈과 풍요가 뒤섞인 물류의 기억을 각각 품게 된 셈이다.
교통 발달로 승객이 서서히 줄어들던 나주역과 영산포역은 호남선 복선 전철화 사업 이후 통합되어, ‘나주역’이라는 이름으로 송월동에서 새로 영업을 시작했다. 기차역으로서의 소임은 2001년 마무리됐지만, 이후의 길은 서로 달랐다. 죽림동의 옛 나주역은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라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인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함께 그 의의를 보전하고 전파하는 명소로, 오늘날 ‘죽림동 근·현대역사문화거리’의 중심으로 되살아났다.
영산포역은 이보다 조금 더 버텼다. 1969년 2세대, 1984년 3세대 역사를 거치며 명맥을 이어가다 2004년 폐역됐다. 그보다 앞서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 공사로 바닷물이 드나들던 물길이 이미 막히면서 포구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끝나 있었으니, 영산포는 물길과 철길을 한 세대 터울로 차례로 잃은 셈이다.
역이 사라지고 뱃길이 끊긴 뒤에도 홍어의 명맥을 지키고, 나아가 전국 무대로 끌어올린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영산포 홍어의 거리에서 만난 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홍어는 본래 영산강 이남, 그러니까 여수·보성 등 동부권까지만 즐겨 먹던 향토 음식이었을 뿐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는 낯선 식재료였다. 이 홍어를 전국 상품으로 개발한 이들이 지금은 고인이 된 안국환 씨와, 지금도 백화점에 납품을 이어가고 있는 강건희,양치권 씨 등 서너 명의 선구자였다. 이들이 40~50년 전부터 숙성 기술과 유통망을 함께 발전시킨 덕분에, 지역 음식이던 영산포 홍어는 비로소 전국구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오늘날 홍어의 거리에는 홍어삼합 같은 전통 방식 외에도 홍어김치, 홍어전처럼 톡 쏘는 맛을 다양하게 변주한 상품들이 개발돼 판매되고 있다.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선창 인근에 자리 잡은 소수의 홍어집들이 전국 판매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와 저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옛 영산포 선창을 오가던 돛단배의 기억은 나주시가 관광용으로 띄운 황포돛배 한 척이 영산강을 오가며 상징적으로 잇고 있다.
강과 철도가 사라진 자리에서도 홍어는 살아남았다. 1997년 영산포식품이 소포장 규격화 제품을 만들어 외부 판로를 개척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대량 숙성·유통 시설이 들어서면서 영산포 홍어는 지역 특산물을 넘어 전국구 먹거리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현재는 매년 봄 영산포 홍어·한우축제가 열려 유채꽃 만발한 강변에서 황포돛배가 재현되고, 폐역이 됐던 옛 영산포역 자리에는 영산포역사 문화체험전시관과 나주철도공원이 들어서 근대 물류사의 기억을 전하고 있다.
결국 1913년 같은 날 태어난 두 역은, 하나는 ‘사건’으로 다른 하나는 ‘미각’으로 나주의 근대사를 증언하고 있다. 나주역이 항일 정신이 새겨진 기념물로 남았다면, 영산포역은 강과 철길이 함께 빚어낸 삭힌 홍어의 향, 그리고 그 맛을 전국에 알린 이름 없는 상인들의 노력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항아리 속에서 삭아가던 홍어 한 마리가 남긴 알싸한 맛은 600년째 강변을 떠나지 않았고, 영산포라는 이름 역시 뱃길과 철길의 기억을 품은 채 오늘도 이 거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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