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흘렀지만 영산포역은 그대로다. 옛 정취를 간직한채 철도공원으로 다시 태어난 영산포역 사진=안행자
미카 5-31,멈춰버린 기적소리 정면으로 마주하니 그 위용이 남다릅니다. 둥근 보일러와 검은 몸체,파란 줄무늬 완충기까지 한 시대를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 미카 5-31이 이제는 영산포철도공원 한켠에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던 하얀 연기와 우렁찬 기적 소리는 사라졌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사진=안행자
낡은 물건이 들려주는 그 시절 역무원의 이야기 타자기,통표,제복까지영산포역의 흔적을 만나다. 사진=(구) 영산포역
삼립호빵 냄새가 날 것 같은, 그 시절 매점 홍익매점에서 만나는 추억의 공간 엣 정취를 그대로 살린 그 시절의  매점이 정겹게 재현되어 있다. 사진=(구)영산포역
빛바랜 사진 속, 그 날의 영산포 읍사무소 액자 속에 담긴 옛 영산포읍사무소의 모습, 정문의 육중한 기둥과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 태극기가 휘날리던 본관 건물까지 흑백 사진 한장이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진=(구)영산포역
사라진 풍경 영산포초등학교 앞 신작로 짐을 실은 트럭과 오토바이가 오가던 흑백 사진 한장,포장도 안된 신작로 위로 아이들이 뛰놀던 그 시절,영산포는 지역의 중심지로 분주했다. 지금은 사진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날의 거리 풍경이다. 사진=(구)영산포역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영산강변, 이른바 ‘홍어의 거리’에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알싸한 향이 먼저 마중 나온다. 30여 곳의 홍어 전문점이 늘어선 이 거리는 단순한 먹거리 골목이 아니다. 고려 말부터 600년 넘게 이어진 발효 문화의 현장이자, 한때 국내 굴지의 내륙 포구였던 영산포의 마지막 흔적이다. 그리고 이 향기로운 골목에서 3.4km 떨어진 죽림동에는, 같은 날 태어났으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게 된 또 하나의 역이 남아 있다.

삭힌 홍어의 유래는 조선 중종 25년(1530) 편찬된 관찬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려 말 남해안 일대에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지자 국가에서 섬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고, 흑산도 인근 영산도 사람들이 뱃길로 영산포까지 옮겨오면서 자신들이 즐겨 먹던 홍어도 함께 가져왔다. 당시만 해도 해상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뱃길로 반나절 이상, 길게는 보름 가까이 걸렸다. 이 시간이 자연 숙성의 과정이 됐다. 같은 홍어라도 흑산도에서는 날것으로 먹지만, 영산포에서는 숙성해서 먹는 기술로 발전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중 집필한 자산어보에도 나주 인근 사람들이 삭힌 홍어를 즐긴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 지역과 숙성 홍어의 인연이 조선 중기 이전부터 이어져 왔음을 뒷받침한다.

영산포가 홍어의 종착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곳이 오래전부터 호남 최대의 물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창이 설치됐던 영산포는 조선시대에도 호남을 대표하는 영산창이 자리해 조운선 53척이 매년 3만 석 가량의 세곡을 운송할 정도로 규모가 컸고, 관할구역만 17개 고을에 달했다. 조선 후기 인구 5천 명 이상 도시 가운데 전라도에서는 전주, 나주, 광주, 태인, 제주 다섯 곳만 이름을 올렸는데, 나주가 이 대열에 낄 수 있었던 것도 영산강이라는 수운 덕분이었다.

이런 물류 기반 위에서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과 함께 나주에는 역이 두 곳 동시에 문을 열었다. 나주읍성 인근 죽림동의 나주역과, 영산강 포구를 낀 영산포역이다. 불과 3.4km 지척에 굳이 역을 두 곳이나 세운 것은 영산강을 이용한 목포~영산포 간 내륙 해운과의 연계성을 감안한 결정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강의 도시 나주에 육로와 수로가 만나는 관문이 두 개나 필요했던 셈이다.

나주시 죽림동 60-1에 위치한 나주역사(羅州驛舍)는 신축 당시 설계도나 공사 관련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1923년 북쪽 벽에 4평(13.2㎡) 규모의 화물창고가 증축된 것으로 확인된다. 1970년에는 일본식 기와를 골스레이트로 교체하고 건물 외부에 있던 개찰구를 내부로 옮기는 개보수가 이뤄졌지만, 건물의 기본 구조와 골조 목재 등은 신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2000년 12월 2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됐다.

나주역사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건축적 가치를 넘어선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경 이 역 인근에서 나주 통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벌어진 다툼, 이른바 ‘댕기머리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 154개교, 5만4000여 명이 참여한 학생독립운동으로 번졌다. 일제강점기 3대 항일민족운동으로 꼽히는 이 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나주역이다. 1970년대까지 나주읍성과 주변 상권을 잇는 교통의 관문이었던 나주역 앞 죽림동 거리에는 여인숙과 식당이 늘어섰고, 대나무로 유명했던 이 지역 상인들은 소쿠리에 나주 배를 담아 열차 안팎에서 팔기도 했다.

영산포역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개통 직후부터 뱃길과 철길이 교차하는 물류 환승지 역할을 했던 이 역은, 1927년 조선철도연선요람에 따르면 영산포가 교통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우마차 40대와 손수레 70대가 대기할 정도로 화물 운송량이 늘었다. 미곡·면화·누에고치·잡곡·가마니·죽제품 등 각종 농수산물이 이곳을 거쳐 반출됐고, 흑산도에서 뱃길로 실려 온 홍어 역시 이 물류망의 일부였다. 홍어를 실은 배가 영산포 선창에 닿으면 그 자리가 곧 어판장 구실을 했다. 영산도에서 잡아온 홍어와 상인들이 선창에서 직접 거래를 하며 유통이 이뤄졌던 것이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긴 뱃길 위에서 저절로 삭아버린 홍어가 오히려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영산포는 강과 철도가 함께 떠받치는 숙성 홍어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아갔다.

다만 같은 물류망은 수탈의 통로이기도 했다. 1913년 영산포역 이용객 중 일본인 상인의 비중이 45%에 달했고, 13개에 이르렀던 쌀 도정공장의 존재는 이 철길이 조선 농수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데도 쓰였음을 보여준다. 한 역은 항일의 함성을, 다른 한 역은 수탈과 풍요가 뒤섞인 물류의 기억을 각각 품게 된 셈이다.

교통 발달로 승객이 서서히 줄어들던 나주역과 영산포역은 호남선 복선 전철화 사업 이후 통합되어, ‘나주역’이라는 이름으로 송월동에서 새로 영업을 시작했다. 기차역으로서의 소임은 2001년 마무리됐지만, 이후의 길은 서로 달랐다. 죽림동의 옛 나주역은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라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인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함께 그 의의를 보전하고 전파하는 명소로, 오늘날 ‘죽림동 근·현대역사문화거리’의 중심으로 되살아났다.

영산포역은 이보다 조금 더 버텼다. 1969년 2세대, 1984년 3세대 역사를 거치며 명맥을 이어가다 2004년 폐역됐다. 그보다 앞서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 공사로 바닷물이 드나들던 물길이 이미 막히면서 포구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끝나 있었으니, 영산포는 물길과 철길을 한 세대 터울로 차례로 잃은 셈이다.

역이 사라지고 뱃길이 끊긴 뒤에도 홍어의 명맥을 지키고, 나아가 전국 무대로 끌어올린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영산포 홍어의 거리에서 만난 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홍어는 본래 영산강 이남, 그러니까 여수·보성 등 동부권까지만 즐겨 먹던 향토 음식이었을 뿐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는 낯선 식재료였다. 이 홍어를 전국 상품으로 개발한 이들이 지금은 고인이 된 안국환 씨와, 지금도 백화점에 납품을 이어가고 있는 강건희,양치권 씨 등 서너 명의 선구자였다. 이들이 40~50년 전부터 숙성 기술과 유통망을 함께 발전시킨 덕분에, 지역 음식이던 영산포 홍어는 비로소 전국구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영산포 대표 별미 홍어 삼합 삭힌 홍어와 두툼한 돼지고기 편육, 그리고 아삭한 묵은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홍어삼합, 알싸하게 톡 쏘는 홍어의 향과 부드러운 수육이 만나 특유의 조화로운 맛을 낸다. 초장까지 곁들이면 그야말로 영산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한 한 상이다. 사진=안행자
맛있는 홍어 뒤에 숨은 정성 위생적으로 손질되는 영산포 홍어 작업 현장, 사진=안행자
대한민국 홍어의 본고장, 영산포 홍어의 거리 노란별과 마스코트 “홍스타” 가 반겨주는 이곳은 영산포 홍어거리 “홍어 1번지” 라는 간판부터 곳곳에 그려진 홍어 그림까지 거리 전체가 홍어 하나로 가득하다. 삭힌 홍어 특유의 깊은 맛을 찾아 전국에서 미식가들이 모여드는 이유를 이곳에 오면 알 수 있다. 사진=안행자

오늘날 홍어의 거리에는 홍어삼합 같은 전통 방식 외에도 홍어김치, 홍어전처럼 톡 쏘는 맛을 다양하게 변주한 상품들이 개발돼 판매되고 있다.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선창 인근에 자리 잡은 소수의 홍어집들이 전국 판매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와 저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옛 영산포 선창을 오가던 돛단배의 기억은 나주시가 관광용으로 띄운 황포돛배 한 척이 영산강을 오가며 상징적으로 잇고 있다.

강과 철도가 사라진 자리에서도 홍어는 살아남았다. 1997년 영산포식품이 소포장 규격화 제품을 만들어 외부 판로를 개척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대량 숙성·유통 시설이 들어서면서 영산포 홍어는 지역 특산물을 넘어 전국구 먹거리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현재는 매년 봄 영산포 홍어·한우축제가 열려 유채꽃 만발한 강변에서 황포돛배가 재현되고, 폐역이 됐던 옛 영산포역 자리에는 영산포역사 문화체험전시관과 나주철도공원이 들어서 근대 물류사의 기억을 전하고 있다.

결국 1913년 같은 날 태어난 두 역은, 하나는 ‘사건’으로 다른 하나는 ‘미각’으로 나주의 근대사를 증언하고 있다. 나주역이 항일 정신이 새겨진 기념물로 남았다면, 영산포역은 강과 철길이 함께 빚어낸 삭힌 홍어의 향, 그리고 그 맛을 전국에 알린 이름 없는 상인들의 노력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항아리 속에서 삭아가던 홍어 한 마리가 남긴 알싸한 맛은 600년째 강변을 떠나지 않았고, 영산포라는 이름 역시 뱃길과 철길의 기억을 품은 채 오늘도 이 거리에 남아 있다.

민트빛 창틀과 하얀벽, 낡은 함석지붕까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주역, 비내리는날 마주한 이 소박한 역사는 화려하지 않아도 정겨운 옛 정취를 전해준다. 세월이 머문자리 나주역. 사진=안행자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다. 빗물에 젖은 돌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만나는 나주학생동립운동기념관.1929년, 나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저항은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차분한 건축물 속에 그날의 뜨거웠던 청년들의 용기와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 =안행자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타오른 함성 우뚝선 기념탑 꼭대기, 청동으로 빚어진 학생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다. 받침돌에 새겨진 숫자”10.30″은 이곳 나주역에서 시작된 그날의 사건을 말없이 증언한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앞에서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일본인 학생들과의 다툼은 단순한 충돌로 끝나지 않았다. 억눌려 잇던 민족의 분노가 이 작은 사건을 도화선 삼아 폭발했고, 이는 전국 곳곳으로 본져나간 광주학생도립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날카롭게 솟는 스테인리스 조형물은 그날의 저항 정신을, 그 위에 선 학생들의 동상은 굴하지 않았던 청년들의 기개를 상징한다. 나주역이라는 평범한 공간이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현장이 되었는지, 이 기념탑은 오늘도 조용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안행자
실물로 되살아난 그날의 함성 1929년 나주역 항일운동의 시작을 재현하다. 사진=(구)나주역
11월 12일 2차 시위 꺼지지 않는 불길로 전시관 벽면 기득채운 흑백 사진들이 그날의 열기를 전한다. 거리를 가득메운 학생들의 행렬과 격문,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의 사진속 얼굴들, 나주역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는 이렇게 광주 전역으로 다시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한 차레의 시위로 그치지 않고 거듭 타올랐던 학생들의 저항 정신이 , 이 공간 곳곳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사진=(구)나주역
눈물뿌린 이별가 권오헌 지사의 어머니가 고향 안동을 떠나 만주로 향하던 그 순간, 붓끝으로 눌러 쓴 한글 가사다. 독립 운동에 나선 아들과 손자를 따라나서야 했던 한 여인의 심정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정든 고향을 등지는 슬픔, 그러나 끝내 가족을 따라나서는 결연함까지 짧은 글귀 안에 그 시절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사진=(구)나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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