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관 비석군. 사진=우미옥
금성관 비석군. 사진=우미옥
금성관 비석군. 사진=우미옥

금성관 앞마당을 걷다 보면 돌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마주치게 된다. 어떤 것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우뚝 솟아 있고, 어떤 것은 용과 구름이 뒤엉킨 머릿돌을 이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이 돌들이 바로 금성관 비석군이다.

원래 이 비석들은 나주읍성 사대문 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총 27기 가운데 25기는 조선시대(1392~1910) 나주목사를 비롯한 지방관들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임기 중이나 임기를 마친 뒤에 세운 것들이다. 나머지 2기는 조선 말기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나주 군청으로 사용되던 금성관 경내에 임시로 모아두었다가 201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정비되었다.

비석들이 전하는 시간의 폭은 깊다. 가장 오래된 것은 1575년, 선조 8년에 세워진 목사 김우흠 자혜비다. 450년 전 나주 백성이 손수 돌을 다듬어 고마움을 새긴 것이다. 이후 1605년의 목사 우복흥 선정비, 1629년의 목사 신계영 선정비, 1638년의 목사 구봉서 선정비까지, 인조·효종·현종 연간을 거치며 목민관과 백성 사이에 오간 신뢰의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비석군의 시간은 19세기까지 이어져 1831년의 목사 조함영 선정비, 1837년의 목사 박라겸 선정비에 이르기까지 나주의 역사를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생김새도 읽을 줄 알면 이야기가 보인다. 귀부(龜趺), 곧 거북 받침돌 위에 세워진 비석은 높은 격식을 갖춘 것으로, 당시 나주목이 전라도에서 차지하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머릿돌에 정교하게 조각된 용과 구름 문양은 수백 년의 풍화를 견디고도 그 솜씨를 잃지 않았다. 돌을 다루는 장인의 손길과, 그 장인을 부른 백성의 뜻이 함께 남아 있는 것이다.

27기 중에서도 특별히 눈길을 끄는 비석이 둘 있다. 하나는 1653년, 효종 4년에 세워진 사마교비(司馬橋碑)다. 조선시대 나주 사마교를 수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이 비석은 선정비와는 다른 결의 기억을 품고 있다. 또 하나는 1895년, 고종 32년에 세워진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성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비석이다. 현재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이 비석은, 19세기 말 나주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었는지를 조용히 증언한다.

비석군은 그저 오래된 돌의 모음이 아니다. 수백 년에 걸쳐 나주를 다스린 이들이 어떻게 백성과 관계를 맺었는지, 백성은 그 관계를 어떻게 기억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기억이 어떤 형태로 오늘날까지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료다. 금성관이라는 조선시대 객사의 권위 있는 공간 안에 이 비석들이 자리를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닌 역사의 섭리처럼 느껴진다.

이 비석군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이 있다. 기록은 권력이 아니라 백성의 몫이었다. 조선의 나주 사람들은 좋은 목민관이 떠난 자리에 스스로 돌을 세우고 이름을 새겼다. 미화도 없고 강요도 없었다. 그저 함께 살아온 시간의 진실을 돌에 남겼을 뿐이다. 그 전통이 오늘날에도 이어진다면 어떨까. 선정을 베푼 정치인에게는 마땅한 기록을, 그렇지 못한 이에게도 가감 없는 기록을 — 칭송이든 비판이든 사실에 충실한 기록의 문화가 이 땅에 뿌리내린다면, 미래의 나주 사람들도 오늘의 우리를 공정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금성관 비석군은 그 출발점으로서 손색이 없다.

나주를 찾는 이라면, 금성관의 웅장한 기둥과 단청 못지않게 앞마당의 비석들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주기 바란다. 서투른 한자 몇 글자를 눈으로 좇다 보면, 4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돌에 새겨 남긴 말이 들려오는 듯한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