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정과 동백나무. 사진=김재준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 자리한 ‘금사정’과 동백나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매서운 절개와 꼿꼿한 지조가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공간이다. 담양 용추폭포에서 시작된 영산강이 굽이쳐 흐르고 넓은 나주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봉의산 자락의 금사정이라는 정자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인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로 낙향한 선비들에 의해 지어졌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조광조가 잡혀가자 한양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나주 출신 젊은 유생 임붕, 나일손 등 240명은 목숨을 걸고 조광조는 죄가 없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이들의 간절한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개혁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금사정에 얽힌 역사

정치의 비정함과 암울한 현실에 환멸을 느낀 나주 출신 선비 11명은 고향으로 돌아와 금사정을 짓고 ‘금강11인현계(금강계)’를 조직했다. 이 계는 당시 문중계나 마을 계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정치적 결사체이자 지조를 지키기 위한 동지회에 가까웠다.

금강계 결성을 주도한 인물은 임붕으로, 백호 임제의 조부이기도 하다. 임붕은 1510년 과거 시험에서 조광조가 장원 급제했을 때 함께 합격했던 깊은 인연이 있어 상소를 올릴 때도 앞장섰고, 낙향 후 계를 조직할 때도 중심 역할을 했다.

주요 인물 11인을 보면 승정원에서 기록을 담당하던 정자 임붕을 비롯해 유학교육과 국가 제례를 지내던 성균관 소속 사예를 지낸 나일손, 김두, 김구, 김식, 김안복, 진이손, 진삼손, 진세공, 정문손, 정호 등 나주 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인 나주 임씨, 나주 나씨 젊은 엘리트 선비들이 참여했다.

금강계 활동에 대하여

상소가 좌절되고 몽둥이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으며 한양에서 나주까지 맨발로 내려온 이들은,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고향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유대를 이어갔다.

첫째, 영산강 선유와 강론이었다. 당시 금강이라 부르던 영산강에서 배를 띄워놓고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선유였으나, 실상 배 위에서 나눈 대화의 핵심은 조정 정치의 비정함에 대한 비판과 성리학 학문에 대한 강론이었다.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꺾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다.

둘째, 시회와 기록물 남기기였다. 선비들답게 모일 때마다 시를 지어 서로의 뜻을 확인했다. 당시 계원이었던 정문손이 지은 ‘금강정’이라는 시는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 삼간 지어내니(十載經營數椽)”라는 첫 구절로 시작되는데, 이는 훗날 가곡과 시조창으로 널리 불릴 만큼 금강계의 풍류와 정신을 대표하는 명시가 됐다.

셋째, 철저한 계회안 관리였다. 조선시대 선비 조직인 만큼 이들도 명부와 활동 기록인 계안을 작성하여 보관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영산강을 타고 육지로 들어온 왜적들에 의해 모두 불타 버렸다. 다행히 정문손의 ‘모효공문집’, 나주 나씨의 ‘충렬공 족회안’ 등을 통해 금강계의 전체적인 조직 명단과 구체적인 활동 윤곽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금강계가 남긴 훗날의 교훈

첫째, 부당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의리다.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화를 입었을 때 목숨을 걸고 구명 상소를 올렸으며, 조정의 정치가 무너지자 부귀영화나 출세에 미련을 두지 않고 결연히 벼벼슬을 버렸다. 불의한 권력에 줄을 서지 않고 도덕적 양심을 선택한 강직함을 그대로 보여 준다.

둘째, 변치 않는 신의와 연대다. 낙향한 11인의 선비는 고립되는 대신 금강계를 결성하고 금사정 앞에 동백나무를 심어,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잎의 푸르름을 간직한 채 붉게 피어나는 것처럼 신의를 지키고 단결하는 상부상조와 연대의식을 남겼다.

셋째, 절망 속에서도 고향으로 내려와 지역 문화와 교육으로 승화시키는 실천을 보여 줬다. 벼슬길이 막혔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방탕함에 빠지지 않고 고향 나주로 내려와 시회를 열고 학문을 강론하며 향촌 사회의 도덕적 기틀을 잡는 데 힘썼다. 이러한 실천은 나주가 호남 사림의 중요한 거점이자 학문과 의향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넷째, 시대를 뛰어넘는 공직자의 도덕적 책무를 보여 줬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나라가 기우뚱했던 이유도 위정자와 관리들이 지조와 의리를 잊고 사리사욕을 탐했기 때문이다. 금강계의 삶은 지식인과 공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높은 도덕적 기준(노블레스 오블리주)이 무엇인지 후대에 묵직한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금사정 동백나무

나주시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하나는 공산면 상방리 마을 입구에 심어진 호랑가시나무(천연기념물 제516호)이고 다른 하나는 이 금사정 동백나무(천연기념물 제515호)다. 이 두 그루의 나무는 2009년 12월 30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동백나무를 심은 뜻은 중앙정치의 비정함을 한탄하며,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고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를 심어 서로 변치 않는 절개와 지조를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보통 동백나무는 무리를 지어 자라는 군락 형태가 많지만, 금사정 동백나무는 한 그루의 독립된 나무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최초의 사례다. 높이는 6m에 줄기 둘레가 2.4m에 이르며,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조사된 동백나무 중 가장 굵고 큰 편에 속한다. 또 나무가 사방으로 고르게 뻗어 나가며 둥근 쟁반을 엎어 놓은 듯한 반구형의 아름다운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어 조형미가 매우 뛰어난 편이다.

겨울철 차가운 바람 속에서 강렬한 붉은 꽃을 피우고, 시들지 않은 채 꽃송이가 통째로 툭 떨어지는 동백의 모습은 예로부터 문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금사정 동백나무 역시 강희안의 조선 전기 원예서인 ‘양화소록’을 비롯한 전통 문헌에 자주 등장하며 조상들이 가까이 두고 아끼던 전통 꽃나무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매년 이른 봄이 되면 여전히 붉고 탐스러운 꽃을 피워내며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이 동백나무는 500년 전 유생들의 꼿꼿한 선비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채 오늘날까지 푸르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자연유산 그 이상의 깊은 울림을 준다.

나주시 왕곡면에서는 이 나무의 문화적 자산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금사정 동백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로 2회째를 맞이했다. 개막식과 함께 동백 장생기원제, 사생대회, 동백차 시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려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역사의 숨결을 나누는 장이 되고 있다.

이 기사는 보건복지부·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주최하고 사회적협동조합 시니어신문네트워크가 주관하는 ‘2026 노인자원봉사 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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