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진 풀숲과 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석관정. 정면 2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갖춘 지금의 모습은 1998년 중건 당시 세운 것이나, 그 터는 1530년 무렵 함평이씨 후손이 처음 정자를 세운 이래 5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오른편 안내판 아래로 무성해진 잡초는, 기사에서 지적했듯 한자 위주의 비문과 함께 정자의 내력을 오늘의 탐방객에게 전하는 데 아쉬움을 남긴다. 사진=안행자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석관정 인근에 세워진 표석비. ‘영산강 제3경 석관귀범(石串歸帆)’을 새긴 이 비는 정자 아래 물굽이로 돌아드는 돛단배의 정취를 오늘에 전하며, 500년 가까이 강변을 지켜온 석관정의 내력을 말없이 증언한다. 사진=안행자
울창한 대숲 사이로 ‘영산강 이야기’ 안내탑이 솟아 있다. ‘영산강 제3경 석관귀범(石串歸帆)’을 새긴 이 탑은 앞서 소개한 표석비와 함께 이곳이 영산강의 대표 절경으로 꼽혀온 내력을 알리며, 대나무 잎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이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켜온 나루터의 정취를 한층 더한다. 사진=안행자
진입로 옆으로 넓게 포장된 공터에 차단봉들이 줄지어 서 있어, 방문객들이 차를 세워두고 도보로 정자까지 걸어 들어가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인 만큼 소박한 규모의 주차 공간이지만, 이 길을 지나야 비로소 500년 역사의 정자와 마주할 수 있다. 사진=안행자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진 나무 데크길 끝에 은빛 조형물이 서 있다. ‘영산강 제3경 석관귀범’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나루에서 임을 떠나보내던 여인의 모습을 담아, 앞서 소개한 이별바위의 사연을 오늘에 되살린다. 금속 표면에 비친 주변 숲과 하늘은, 옛 나루터를 오가던 이별과 그리움이 시간이 흘러도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사진=안행자
나루 옆으로 물살에 깎여 나온 이 바위가 옛 기록이 전하는 이별바위로 짐작된다. 전쟁이 날 때마다 강 건너로 떠나는 장정들을 배에 태워 보내던 자리이자, 뒤따라온 이들이 넓어진 강폭을 끝내 건너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거나 몸을 던졌다는 슬픈 사연이 구전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지금은 푸른 나무가 바위를 뒤덮고 강물도 잔잔하지만, 정자 아래 나루터를 오가던 이들의 만남과 이별이 이 벼랑 하나에 겹겹이 쌓여 있었던 셈이다. 사진=안행자
무성한 갈대숲 너머로 영산강이 완만하게 굽이쳐 흐른다. 흙빛을 머금은 강물은 목포 하구언이 밀물을 막으면서 예전의 맑은 정취를 잃었다는 지적을 떠올리게 하지만, 강 건너 벼랑을 뒤덮은 짙은 녹음과 그 사이로 삐져나온 바위는 여전히 이곳이 영산강 절경으로 불렸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앞서 사진 속 이별바위와 같은 벼랑이 이번에는 강 건너 먼발치에서, 강물의 흐름과 함께 다른 표정으로 드러난다. 사진=안행자

“영산강 굽이에 선 나주 제1정”…석관정, 문화재 지정은 왜 멈췄나
17대손 이광남 나주향교 전교 “문중이 뜻 모으는 것이 먼저”

 “1530년 함평이씨 후손이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폐허가 됐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중수하며 나주 제일의 정자로 이름을 지켜왔다”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영산강 본류에 고막천이 합류하는 절벽 위에 정자 한 채가 서 있다. 강 건너 금강정과 마주 보는 이 정자가 석관정(石串亭)이다. 예로부터 나주 제일의 정자, 영산강 제일의 경치로 불려 왔다.

석관정의 17대손인 이광남 나주향교 전교는 이 정자가 나주의 여러 정자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졌고 강변 경관도 으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방송사가 영산강을 조사할 때도 나주 제1정으로 꼽혔다”고 말했다. 40여 년 전 귀농해 정자 인근에서 10여 년을 산 이 전교는 두 갈래 물길이 정자 양쪽에서 만나고 갈라지는 까닭에 밀물과 썰물 때 물살이 대단하다고 했다.

‘석관’은 바위가 뛰어나온 돌곶을 한자로 옮긴 말이다. 1759년 진사 최화가 지은 〈석관정기〉는 이 바위의 생김새를 누운 소, 앞뒤로 줄지어 엎드린 거북, 꿰미에 꿴 돌에 견주었다. 상류에서 내려온 급류가 곧장 부딪히는 자리인데도 바위가 층층이 받치고 있어 흙이 쓸려 나가지 않았고, 그 덕에 정자가 오래도록 강변을 지킬 수 있었다.

‘석관(石串)’이라는 호에 담긴 풍경을 두고 이 전교는 한 대학 교수의 풀이를 빌려 설명했다. 열두 물줄기가 돌아 서해로 빠져나가는 모양이 곶감을 꼬챙이에 꿴 듯해 꿸 ‘관(串)’ 자를 썼다는 것이다.

석관정은 함평이씨 이진충이 1522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신녕현감을 지내다 퇴임한 뒤, 1530년 무렵 세운 누정이다. 정자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의 침략으로 폐허가 됐고, 후손들이 몇 차례 손을 보다가 1755년 공조참판 이시창(1691~1780)이 중건했다. 이때의 중건기는 따로 전하지 않고, 이시창이 남긴 7언율시 한 수만 시판으로 걸려 있다. 시의 요지는 이 정자를 지은 것이 선대의 업을 잇기 위함이지 놀자고 지은 것이 아니라는 다짐이다. 후대 문인들이 이 시에 차운한 시들을 잇달아 지어 시판으로 만들어 걸었고, 그 운자가 주(洲)·유(遊)·유(流)·추(秋)·주(舟)로 이어진다.

세월이 흘러 정자가 다시 낡자 1906년에는 후손 춘헌이 재차 중건했고, 방계 후손인 탁헌(1842~1914, 호 남파)이 기문을 지었다. 탁헌은 기문에서 금성산 아래 영산강가에 세워진 여러 누정 가운데 석관정이 유독 신령한 기운을 타고났다고 적었다. 이후 1937년에도 한 차례 손질을 거쳤고, 1998년에는 정면 2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석조 건물로 다시 중건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후손의 기억 속에서도 정자의 수난은 이어진다. 이 전교는 정유재란 때 왜군이 올라와 정자를 불태웠고,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고 전했다. 일제강점기에도 보수가 이어졌으나 목재가 썩어 문중 회의를 거쳐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이 전교는 시의원 시절 시 지원금 1,500만 원을 받아 문중이 비용을 보태 보수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조 가운데 권율 장군 휘하에서 행주대첩에 참전한 이광선 장군이 있다고도 소개했다.

정자 안에는 최광언, 장헌주, 기계상, 이탁헌, 이계우, 이광헌, 이재근, 문창규, 이영범, 이광남, 이목헌 등이 지은 시문을 새긴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가운데 장헌주(1777~1867)의 시는 그의 문집 《여력재집》에도 실려 있을 만큼 문인으로서 이름이 있었다. 진사시에 급제한 기계상의 차운시 한 편에는 정자에 새로 편액이 걸린 정황과 강바람·달빛·고깃배를 노래한 구절이 이어지고, 율산 문창규가 지은 〈석관정시회〉라는 제목의 시판도 눈에 띈다. 정자 하나로 이름을 낸 이 자리가 금강 서쪽 물가에 우뚝 서 있다는 자부심과, 주인과 손님이 어울려 시를 주고받은 지 어느덧 칠십 년이 되었다는 감회를 담고 있다. 이는 석관정이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오랜 세월 지역 문인들이 모여 시회를 열던 사랑방 구실을 했음을 보여준다.

정자 아래에는 조선시대 동당리와 강 건너 공산면 신곡리를 오가던 ‘석관정 나루’가 있었다. 나루 옆 이별바위는 전쟁이 날 때마다 장정들을 배에 태워 떠나보내던 자리로, 남편이나 연인을 따라왔던 이들이 넓어진 강을 끝내 건너지 못하고 이곳에서 이별하거나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슬픈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진다. 강 건너 마주 보는 곳에는 광산김씨 김상수가 부친의 노년 휴식을 위해 지었다는 금강정과, 주몽세트장이 있는 나주영상테마파크가 자리한다.

2017년 호남지방문헌연구소 나천수 전문위원은 목포 하구언이 밀물을 막고 수질이 나빠지면서 영산강의 별미(어팔진미)와 강변 밭의 나물 별미(소팔진미)가 전설이 됐고, 강변 누정들도 옛 정취를 잃었다고 짚은 바 있다. 그럼에도 석관정은 여전히 사람을 부른다. ‘영산강 제3경 석관귀범’을 알리는 표석비가 서 있고, 물멍 명소이자 차박 장소로 이곳을 소개하는 나들이 후기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름난 정자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데는 사정이 있다. 이 전교는 세 가지를 들었다. 먼저 문중 갈등이다. 족보의 진위 논쟁과 비석 문구 변경 시비가 불거지며 나주시와 마찰이 생겼고, 지정 추진이 힘을 잃었다고 했다. 다음은 관리 공백이다. 정자 이름을 새긴 현판이 철거돼 사라졌고, 지금은 문중이 벌초만 하는 실정이다. 마지막은 부지다. 영산강 개발로 정자 일대가 하천구역에 들어가 토지 정리가 복잡해졌다. 이 전교는 국토관리청에 요청해 특별법 절차로 개인 소유 140평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하천구역에 있는 선조 묘의 이전 계획도 논의 중이다. 그는 정자가 일제강점기에 보수된 건물이더라도 영산강 경관 자체의 가치가 있어 지정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교수의 말을 전하며 “문중이 하나로 뜻을 모으는 일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석관정의 가치는 건물 한 채에 있지 않다. 강과 바위, 나루, 대를 이어 정자를 고쳐 세운 후손들, 그리고 누정에 걸린 문인들의 글이 한자리에 겹쳐 있다는 데 있다. 임진·정유 두 난리와 세월을 견디고 500년 가까이 이 자리를 지킨 것은 바위와, 그 위에 다시 정자를 올린 사람들이었다. 안내판 아래쪽까지 잡초가 차오르고 정자의 내력을 담은 비문이 한자 위주라 일반 탐방객이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지금, 남은 일은 그 내력을 오가는 사람들이 읽고 알 수 있게 풀어 주는 것이다. 한글 풀이를 곁들인 안내와 주변 정비가 뒤따를 때, 석관정은 오가는 이들에게 그 내력이 오롯이 전해지는 자리로 거듭날 수 있다.

이 기사는 보건복지부·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주최하고 사회적협동조합 시니어신문네트워크가 주관하는 ‘2026 노인자원봉사 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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