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나씨 삼강문 조선시대 나주나씨 가문의 효자.충신.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장려문으로,나주의 오랜 유교 전통과 역사를 보여준다. 사진=안행자
나주나씨 충신을 기리는 정려 현판.순조 계해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며,나주의 오랜 충효정신을 담고 있다. 사진=안행자
하늘및 청명한날,나주나씨 삼강문 정갈한 기와지붕과 단청이 세월을 품은 채 그 자리르 지키고 있다. 사진=안행자
나주나씨 삼강문 처마 끝까지 곱게 남은 단청이 세월의 이야기를 전한다. 사진=안행자

조선은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해 그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붉은 정문(旌門)을 세워 세상의 귀감으로 삼았다. 정려질(旌閭秩)을 받으면 본인은 정려문을, 후손은 부역을 면제받는 복호(復戶)의 은전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 절차는 매우 까다로웠다. 소문난 충효열의 인물이 나오면 마을에서 연명으로 상서문을 지어 향교와 관청에 올리고, 이것이 관찰사를 거쳐 임금에게 전해져 정려질이 결정되기까지 보통 10여 년, 길게는 50여 년이 걸렸다.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 자리한 나주 나씨 금호공파는 이 어려운 정려를 한 가문에서 3대에 걸쳐 여덟 차례나 받았다. 충신 두 사람, 효자 두 사람, 열녀 네 사람이다. 이를 줄여 ‘이충이효사열(二忠二孝四烈)’ 또는 ‘삼세팔정(三世八旌)’이라 부른다. 그 뿌리에 선 인물이 바로 금호(錦湖) 나사침(羅士忱, 1525~?)이다.

나사침은 나주읍성 서수구내(금계리) 옛 집에서 태어나, 16세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했다. 이 일이 1544년 대궐에 알려져 중종 때 정려를 받았다. 《선조실록》 1568년 5월 기사에는 전라감사가 나사침의 효행과 학행을 보고하며 포장을 건의한 기록이 남아 있고, 이에 따라 경기전참봉을 거쳐 노성(이산)현감에 이르렀다. 나사침은 여섯 아들을 두었으니 덕명·덕준·덕윤·덕현·덕신·덕헌이며, 사람들은 이들을 ‘나씨 육룡’이라 불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아들 나덕명이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며 가문 전체가 곤경에 처했다. 전라도 유생들은 “나사침은 이미 중종 때 포상받은 효자이며 충과 효는 본래 두 이치가 없으니, 그 아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상소를 올렸고, 선조는 “나사침 등의 행실이 매우 가상하다”며 포상을 다시 논의하게 했다.

맏아들 나덕명은 1589년 기축옥사로 함경도 경성에 귀양을 갔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사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회령의 반민 국경인·국세필이 두 왕자와 대신들을 왜적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나덕명은 정현룡·오응태 등과 의병을 조직해 국경인·국세필을 참수하고 명천·길주에 주둔한 왜적을 장덕산·쌍포·백탑교 전투에서 잇달아 격파해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했다. 1803년(순조3) 예조가 임금께 아뢰어 나덕명과 그 자손에게 정려와 급복(부역 면제)이 내려졌다.

막내아들 나덕헌의 삶은 이 가문 서사의 절정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해 이덕형의 천거로 의주부윤·삼도통어사에 올랐다. 1636년(인조14) 병자년, 청나라가 국호를 세우던 심양에 춘신사로 파견됐다. 청 태종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조선 사신에게 신하의 예를 요구했고, 나덕헌과 회답사 이확은 끝까지 절하기를 거부했다. 청 태종이 신하를 시켜 회유와 협박을 거듭하자 나덕헌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정명수에게 주며 “내 머리를 가지고 가라”고 맞섰고, 만주족 기병이 “예복을 갖추라”고 다그치자 이확과 함께 동쪽을 향해 임금께 사배를 올린 뒤 손수 관복을 찢고 사모를 벗어던졌다. 이어 스스로 상투를 풀고 드러누워 저항하다가 몸이 끌려다니며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전한 살점이 없을 정도로 매질을 당했다. 청 태종은 “지금 죽이면 저들의 소원을 풀어주는 꼴이 되고 사신을 죽였다는 악명만 남는다”며 결국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귀국하자 관찰사 홍명구는 국경에서 처형할 것을 청했고 삼사와 성균관 유생들도 같은 상소를 올렸으나, 김상헌이 “신문도 해보지 않고 어찌 먼저 목을 베느냐”고 반박해 감형되었다. 나덕헌은 선천으로 귀양 갔다가 조정에서 사행의 진상이 잘못 전해졌음이 밝혀지며 충절을 인정받아 사면됐다. 이후 삼도통어사에 발탁되었고, 1684년(숙종10) 병조참판에 증직됐다. 1779년(정조3) 도승지 홍국영이 “이확은 자손이 없어 정려할 곳이 없으나 나덕헌은 후손이 있다”고 아뢰어 정려와 증시(充烈)가 내려졌고, 1789년 자헌대부 병조참판에 재차 증직됐다.

정조는 훗날 청 건륭황제가 지은 《어제전운시》에서 “조선 사신은 있지만 절을 아니 하니 뜻이 유독 어그러져 버렸다”는 구절을 보고, 그 평가가 실상과 다르다며 나덕헌을 병조판서로 특별 증직하고 시호 ‘충렬(忠烈)’을 내렸다. 교지에는 청 연호 대신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쓰게 했다. 함께 사행했던 이확 역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 충강을 받았으며, 그의 신도비문은 연암 박지원이 지었다.

나사침의 효행은 앞서 소개한 대로다. 그의 넷째 아들 나덕현의 셋째 아들 나득소(1607~?, 자 자장)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책상에 쇠송곳을 꽂아두고 스스로 졸음을 경계하며 학문에 힘썼다. 19세 되던 해 아버지 상을 당해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죽만 먹고 슬피 울부짖다 피눈물을 쏟았고, 지나친 슬픔에 병을 얻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 때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효자로 정려됐다. 후손이 없어 관찬 기록은 드물고, 《나주나씨대동보》와 《여지도서》, 《나주삼강록》에서 겨우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나덕헌의 처 하동정씨와 그의 손위 시누이인 윤항의 처 나씨(나사침의 딸)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사세가 급박해지자 함께 치마끈으로 몸을 묶고 주룡강 늪으로 투신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이 사건이 ‘양부투해도(兩婦投海圖)’로 그려져 실렸는데, 당시 함께 있던 무사 나득호가 두 부인의 부탁을 받아 이 사실을 뒤에 증언하여 1617년(광해군9) 정려됐다. 정문은 나주 반남에 세워졌다.

나덕헌의 며느리, 즉 아들 나수소(선무랑)의 처 언양김씨는 정묘호란(1627) 때 순절했다. 부친은 안주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불을 질러 죽은 장무공 김준이었고, 시아버지 나덕헌(당시 봉산군수)이 사내종을 보내 구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김씨는 “다른 날 지하에서 서로 만나자”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을 베어 순절했다. 인조 때 열녀로 정려됐고, 훗날 청나라 사신도 조선의 절부 중 안주 목사 김준의 딸을 가장 으뜸으로 꼽았다고 전한다.

나사침의 둘째 아들 나덕준의 딸이자 참봉 김응기의 손부인 김집의 처 나씨는 1597년 정유왜란 때 왜적을 만나자, 세 살 난 딸을 안고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음을 헤아려 자신의 띠를 풀어 딸과 함께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어미와 딸이 한 나무에서 나란히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인조 때 열녀로 정려됐다.

나주나씨 삼강문과 정려 현판은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267-1번지에 남아 있다. 1871년(고종8) 가선대부 이조참판 허전이 지은 중수기에는 “나주나씨 이효자, 이충신, 사절부에 대해 정문을 세워 표창했으니, 조·자·손 3대에 8정을 명받은 것은 옛날에도 매우 드문 일”이라고 적혀 있다. 허전은 이를 백이·숙제(충신 형제), 소련·대련(효자 형제), 봉천 두씨 자매(열녀)의 옛 고사에 견주었다.

현장에 남은 정려 현판 원문은 다음과 같다. 효자 나사침 정려에는 “효자,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통훈대부 니성현감 나사침지려 — 중종35년 경자(1540)”라 새겨져 있고, 효자 나득소 정려에는 “효자 나득소지려, 찬성공지손, 인조조 정표”라 되어 있다. 충신 나덕명 정려에는 “충신 승훈랑 행의금부도사 나덕명지려 — 순묘 계해(1803)”, 충신 나덕헌 정려에는 “충신,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지훈련원사 행절충장군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교동도호부사 증시충열공 나덕헌지려 — 숭정기원후3신축(1781)”이라 새겨졌다. 열녀 하동정씨 정려에는 “열녀, 증장사랑 사옹원참봉 덕헌처 하동정씨지려, 찬성공 제4자부 — 선조조 정표”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나사침 3대에 걸쳐 이어진 여덟 번의 정려는 한 가문의 영예를 넘어, 조선이 충효열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사람을 길러낸 방식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이다. 심양에서 목숨을 걸고 절의를 지킨 나덕헌의 저항, 국난 앞에 의병을 일으킨 나덕명의 결기,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를 살린 나사침의 효심, 그리고 왜란과 호란의 참화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킨 하동정씨·나씨·언양김씨의 마지막 선택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각기 다른 층위의 이야기지만, 당대에는 모두 ‘충과 효는 본래 두 이치가 없다’는 하나의 신념 아래 놓여 있었다. 나주 반남면에 남은 정려문과 빛바랜 현판은 그 신념이 남긴 300년의 흔적이다.

볕 좋은 반남면 대안리 중대마을 길가, 청회색 기와지붕 아래 낡은 홍살 사이로 검은 편액 여덟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그냥 “삼강문”이라 부르지만, 정면에 걸린 현판은 또렷하다. 羅州羅氏三綱門, 나주나씨 삼강문이다.

문 안쪽 가장 눈에 띄는 편액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孝子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行通訓大夫尼山縣監羅公忱之閭.” 효자, 사후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었으나 생전에는 통훈대부 니산현감을 지낸 데 그쳤던 한 선비, 나사침(羅士忱, 1526~1596)의 정려문이다. 그는 열여섯 나이에 병든 어머니를 살리려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다고 전한다.

바로 옆 편액은 그 맏아들의 것이다. “忠臣 承訓郎行義禁府都事 羅公德明之閭.” 편액 한쪽에는 작은 글씨로 “贊成公一子, 純廟癸亥 旌”이라 덧붙어 있다. 찬성공(나사침)의 맏아들이며, 순조 3년인 계해년(1803년)에 정려가 내려졌다는 뜻이다. 나덕명(1551~1610)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 땅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인물이다. 나종석 씨가 말한 “책으로 남아 있다”는 두 충신의 공적 가운데 한 축이 바로 이 나덕명의 이야기다.

두 편액을 시작으로 삼강문에는 모두 여덟 개의 정려가 걸려 있다. 나사침을 비롯해 3대에 걸쳐 배출된 충신 2인, 효자 2인, 열녀 4인의 기록이다. 정유재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며 이 집안의 며느리와 딸, 손부와 손녀까지 절개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지금 서 있는 건물은 1947년 도로 공사로 원래 자리에서 뒤로 물러났다가 1974년 다시 지어진 것이지만, 편액 속 글자들은 여전히 조선 중기 나주 사림가문의 흥망을 눈앞에 그려낸다.

이 마을이 정려문의 자리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나주시청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대안리 4구 중대마을은 나주나씨 순소(舜韶)가 무안에서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터를 잡으면서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후손들이 대안리 일대로 퍼져나갔고, 나사침 가문 역시 이 물길을 따라 나주에 뿌리내린 나주나씨의 한 갈래다.

봄볕아래 정성스러운 손길로 가꾸어지는 사당 뜰 오랜 세월을 지켜온 공간이 오늘도 사람들의 정성으로 새로워진다. 사진=안행자
돌담 너머로 보이는 청록빛 문살이 고운 사당 짙은 숲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자리한 옛 건축의 아름다움. 사진=안행자
짙푸른 신록속 의열각 화려한 단청과 정교한 공포가 돋보이는 또 하나의 유서 깊은 공간. 사진=안행자
나주나씨 선조들의 발자취를 세긴 세 기의 기적비 대대로 이어온 가문의 역사가 돌에 새겨져 오늘에 전한다. 사진=안행자
태극문양이 그려진 솟을대문 굳게 닫힌 나무 문 너머로, 조상의 얼이 담긴 공간이 조용히 이어진다. 사진=안행자

가문의 이야기는 반남면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주 시내 남내동 4-2번지, 향토문화유산 제47호로 지정된 금호사가 그 다음 장이다. 나사침과 그의 아들 6형제(덕명·덕준·덕윤·덕현·덕신·덕헌) 등 7위를 모신 이 사당은 1723년 나주목사 한복이 나사침을 의병장 김천일과 나란히 천거하며 세워졌다고 전한다. 지난해 10월 31일에는 창건 302주년을 맞아 추향대제가 열려, 금호종중 나종석 회장(전 나주시의회 의장)을 비롯해 윤병태 나주시장과 나주향교 유림 등 150여 명이 참례했다. 나사침의 아들들은 훗날 나주의 대표 사액서원인 경현서원 건립까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주 남내동 금호사(錦湖祠)를 오랫동안 지켜온 나주나씨 종친 나종석 씨는 최근 만난 자리에서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두 충신 할아버지의 공적이 담긴 기록이 모두 책으로 남아 있다”며, 현재 나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금호사를 전라남도 문화재로 승격시키기 위한 절차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금호사가 정부 지원을 받아 관리되고 있으며, 도 문화재 승격이 실현되면 가문의 충·효·열 정신이 더욱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승격 움직임의 배경을 좇다 보면, 나주 시내 금호사보다 앞서 세워진 반남면 대안리의 정려문 하나에 먼저 닿게 된다.

결국 반남면 대안리와 나주 남내동은 한 가문이 남긴 두 개의 다른 기록이다. 대안리 삼강문이 나라가 내린 정려로 한 집안의 충효열을 낱낱이 새겨 넣은 자리라면, 남내동 금호사는 그 정려를 받은 이들을 후손들이 대대로 제향해온 자리다. 정려문이 국가가 공인한 증거라면, 사당은 가문이 지켜온 기억인 셈이다. 조선 중기 한 사림가문이 반남 물가에서 시작해 나주 읍내 사당에 이르기까지 남긴 이 두 흔적은, 도 문화재 승격이라는 새로운 장을 앞두고 300년 전의 이야기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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