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주 만에 찾은 시골집.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새벽 5시 반, 감과수원에 약을 치러 나섰다가 관정 고장으로 일은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안개 자욱한 들녘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도시의 매연과 소음에 길들여진 몸이 이곳의 맑은 공기에 온 세포를 활짝 열어젖혔다. 안개가 산자락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모습이 마치 자연이 나를 품에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걸음을 멈춘 곳은 모내기부터 우렁이 넣기, 김매기까지 온 정성을 쏟아부었던 논둑길이었다. 짙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논 위로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고, 벼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이 자연만이 빚어낼 수 있는 작품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태초의 정적 속에 홀로 서 있는 듯했다. 눈을 감고 자연과 하나 되는 기쁨에 흠뻑 빠져들었다.
다시 가만히 벼를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벼꽃이 피는 시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꽃잎도, 진한 향기도 없는 실처럼 가는 수술 두 개가 벼 이삭 전체에 붙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꽃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을 만큼 작고 소박한 모습이었다.
벼꽃! 벼에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골 사람들도 논 한가운데 들어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그야말로 자연이 숨겨둔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벼꽃은 새벽에는 껍질을 닫고 있다가 해가 뜨면 단 몇 시간 동안만 꽃을 열어 수분을 한 뒤 다시 닫혀버린다. 마치 자연이 가장 순수한 시간을 택해 은밀한 생명의 의식을 치르는 것만 같았다.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건만, 정작 자연이 벌이는 가장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며 산다는 것을.
농사를 평생 지어온 할아버지에게 “벼꽃을 직접 본 적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그만큼 이 꽃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가만히 벼꽃을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벼꽃처럼 소중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움들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아가느라 놓치고 있는 자연의 신비들이 얼마나 많을까. 화려한 것만이 아름답다고 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새벽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자연이 보여준 가장 겸손하고 신비로운 꽃, 벼꽃을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벼는 화려한 꽃으로 자신을 뽐내지 않는다. 조용히, 겸손히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소박함 속에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소중한 열매를 맺어낸다.
발걸음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논을 바라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벼꽃이 내게 남긴 깨달음이 가슴 깊이 새겨진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숨어 있고, 진정한 가치는 조용하며, 진정한 기적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때로는 새벽처럼 일찍 일어나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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