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건너 가을비가 내린다. “가을비는 농사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옛말이 있다. 아마도 추수를 앞둔 농부들의 조급한 마음에서 생긴 말이리라.
이런저런 행사들이 주말마다 겹치는 바람에 일주일이나 시골집을 비웠다. 그사이 내리는 빗소리에 마음만 타들어갔다. 단풍이 물드는 산자락 아래, 잦은 비 탓에 대봉감들이 갑작스레 홍시로 익어 우두둑 떨어진다는 소식에 발만 동동 굴렀다.
봄날, 등에 거름을 지고 감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돌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새싹이 돋아나던 연두빛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흘리던 땀방울들.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 매미 소리 가득한 감밭에서 낫으로 풀을 베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감나무에 쏟아부은 정성을 생각하니, 애가 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방법을 생각해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무조건 감밭으로 달려가 홍시를 따서, 평소에 신세를 진 주변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어제 점심을 서둘러 먹고 감밭으로 향했다. 국도를 달리는 내내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마을 어귀 고샅길로 접어들자 익숙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감밭에 도착하니 바닥 곳곳에 빨갛게 익은 홍시들이 낙엽 위에 떨어져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니, 아직도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많은 홍시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나씩 정성스레 따내어 박스에 담다 보니, 어느새 상자가 가득 찼다. 손끝에 전해지는 홍시의 말랑한 감촉, 그윽하게 퍼지는 단내. 이 달콤한 선물을 받을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르자,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감을 따며 문득 깨달았다. 이 감나무의 한 해가, 우리 시니어들의 인생 여정과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봄날의 거름 주기는 젊은 날 흘린 땀과 같았다.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고,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며 쌓아온 수많은 경험들. 여름날 뙤약볕 아래 풀을 베던 고된 노동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이겨낸 그 힘든 순간들이었다. 때론 지칠 만큼 힘들었지만, 그 모든 시간이 결실을 향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가을이다. 감나무에 빨갛게 익은 홍시처럼, 시니어의 삶에도 풍성한 열매가 맺혔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오랜 세월 살아오며 체득한 지혜,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통찰, 어려움을 극복하며 키운 내면의 힘. 이 모든 것이 인생의 홍시다.
상자 가득 담긴 홍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감들이 나무에만 매달려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떨어져 썩어버릴 텐데. 감의 진정한 가치는 누군가에게 전해져 그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할 때 완성된다. 시니어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평생을 살아오며 익혀온 노하우, 실패와 성공을 통해 얻은 교훈들. 이것들이 홀로 간직되어 있다면, 나무에 매달린 채 떨어지는 감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젊은 세대에게 전해지고, 옆 사람들과 나눠질 때, 비로소 진정한 수확이 된다.
어쩌면 시니어의 인생 후반기는 수확과 나눔의 계절인지도 모른다. 청춘 시절 뿌린 씨앗이 이제 익었으니, 이를 거두어 주변과 나누는 것. 그것이 가을을 사는 우리의 아름다운 사명이다.
감밭을 돌아보며 또 하나를 발견했다. 땅에 떨어진 감들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그것들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고, 내년 봄 새로운 열매를 위한 자양분이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시니어가 나눈 지혜와 경험은 젊은이들의 자양분이 되고, 그들은 또 다시 자신만의 열매를 맺어 다음 세대와 나눌 것이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은 선순환한다. 한 세대의 가을이 다음 세대의 봄이 되는 것이다.
여름 내내 흘린 땀방울이 이렇게 가을 햇살 아래 붉게 익어,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기쁨으로 돌아오다니. 떨어진 감에 대한 아쉬움보다,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감사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감밭을 나서며 돌아본 시골 풍경. 노을빛에 물든 산, 그리고 한 해의 정성이 담긴 이 빨간 열매들. 가을이 주는 이 선물을 온마음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안다. 시니어로서 내가 살아온 이 인생도 누군가에겐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겪은 실패, 그것을 극복한 경험, 삶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이 모든 것이 나누어질 때, 비로소 내 인생의 가을은 풍요로워진다.
감나무가 봄부터 가을까지 한 해를 살아내듯, 우리도 인생의 사계절을 온전히 살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에 이르러, 우리는 깨닫는다. 진정한 수확은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나누느냐에 있다는 것을. 시니어의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인생의 끝이 아니라, 나눔과 베풂으로 완성되는 수확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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